[반역조/슌ts] 절망을 끝내는 자
화사한 세상에 균열이 일었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실금은 단숨에 퍼져 세상을 삼키는 균열이 되었다. 그 틈으로 낯선 이가 들이닥쳤다. 그들의 등장과 함께 밝은 세상에 일순 벼락이 치는 듯하더니, 건물이 무너졌다. 사람이 휩쓸렸다. 침략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이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화사하게 빛나던 세상이 순식간에 무채색으로 바뀌는 것을 소년은 보았다. 그와 함께 한낱 잔해로 스러지는 모든 것도.
소년은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 휩쓸려 함께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이란 그렇게 무기력한 것이 전부였다. 결국 이것은 불행한 악몽에 지나지 않기에. 수없이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소년은 차라리 사라지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꿈속에서의 죽음을 뜻했다.
잔해에 깔리는 것과 동시에 소년은 눈을 떴다. 차츰 개이는 시야에는 조금 전까지의 음울한 풍경은 없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며, 소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또 꿈이었다. 무익한 꿈 따위 아예 꾸지 않으면 좋을 텐데. 초라한 잠자리에서 겨우 눈을 붙이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소년은 한 번도 편히 잠든 적이 없었다. 잠을 설치거나 악몽을 꾸는 날의 연속이었다. 이 낯선 땅에서는 하루하루 잠드는 것조차 너무도 어렵다.
꿈속에서 만나는 세상은 언제나 같은 풍경이다. 화사하고 평온한 풍경. 누구에게도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세상.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세상은 절망에 휩쓸리며 참담한 폐허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꿈꾸는 것조차 과분할 정도로 음울한 세상으로. 잔해를 헤집어도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다.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세상이 말 그대로 검게 타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내리깔린 세상이 참혹하여 소년은 때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마저 검었다.
이제 와서 그 풍경을 돌이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 세상에 남은 사람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쳐들어온 적은 모두를 삼켰기 때문에.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은 세계의 재건을 위해 다른 세상으로 몸을 피했다. 소년 또한 그랬다.
낯선 곳이라곤 해도 이곳은 처지가 나은 편이었다. 어디에도 몸 붙일 곳 없는 이방인 신세였으나 두고 온 세상처럼 위험하진 않다. 목숨을 걸고 싸울 일도 없다. 지극히 평화로운 이 세상은, 그들이 떠난 세상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몸을 숨기는 것은 소년의 목적이 이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은.
거기에서 생각이 멈췄다. 불길한 직감에 몸을 일으켜 곁을 보면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이번에도 나간 것일까. 이 세계에 함께 온 동료는 다루기 까다로운 유형이었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서로밖에 없는 주제에 걸핏하면 단독행동을 꾀하는 것이다. 아침에 깨어나면 그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다. 제멋대로 나가버린 탓이다.
네가 위험에 빠지는 건 싫으니까.
따위의 말로, 그녀는 단독행동을 정당화하려 든다. 그것이 절박함과 조급함에서 나온 행동임을 알면서도 언제나 말리는 것은 그들의 삶이 이미 그들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라진 사람들을 짊어지면서 그 삶까지 짊어지기로, 이곳으로 오기 전 약속한 것이다. 만일 이 낯선 세상에서 그들이 휩쓸린다면 그건 그들이 짊어진 사람들마저 내버리는 것이 된다. 너 혼자만의 일이 아니잖아. 라고 타이르면, 그녀는 생기 없는 금빛 눈을 내리깔며 외면했다.
물론 신중하게 행동하려는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적의 수뇌의 본거지가 있다는 정보 하나만을 믿고서 아는 것이라곤 없는 이 세계에 왔다. 적의 약점을 틀어쥐기 위해 이곳에 있는 적의 혈육을 노리는 것이 그들의 계획.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세상이니만큼 무엇이 그들의 목을 조일지 모른다. 더구나 그들의 목표물은 이곳의 현 수장. 그러니 조심스레 움직여, 목표물을 포착하는 즉시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밖에.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나 무모하게 ─ 치미는 불안에 통신기를 통해 연락을 취한다. 물론 돌아오는 답은 없다. 그녀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제가 먼저 나서서 언제나 위험한 것을 떠안으려 한다. 그것도 언제나 혼자서. 이곳에 남은 건 둘뿐인데, 그 하나를 오롯이 의지하지 못하고 위험한 도시를 홀로 맴도는 것이다.
그녀가 홀로 움직이니 소년 역시 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소년은 초라한 아지트를 빠져나온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소년은 남루한 행색으로 세상 속에 숨어든다. 그녀가 닿지 못하는 곳을 살피기 위해, 희망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 세상은 너무도 평화로워, 소년은 때로 질투마저 품는다. 이곳의 모든 것은 그들이 잃은 것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평화로운 웃음. 아이와 함께하는 부모. 활기찬 거리. 저들끼리의 놀이에 빠진 아이들. 소년의 세상에선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것인데 이곳에선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도 낯설었다. 소년의 세상에 닥친 지옥이야말로 잘못된 것인데, 그런데 왜 이 당연한 광경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일까.
“빼앗긴 것에 익숙해진다는 건 참 무섭지.”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죽어가는 세상에서 하루하루 버텨나갈 때의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세상을 보는 것조차 두려웠는데 이제 이게 당연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쓰게 웃으며 말했던 이는 그 이후로 보지 못했다. 며칠 후의 전투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상이란 그런 곳이었다. 잃는 것이 당연하고, 잃은 것을 차마 돌아보지도 못하는 세상. 그에 비해 이곳은 얼마나 빛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행복한지. 소년은 잃은 것을 생각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것도 잃지 않았기에 상실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 소년은 너무도 부러웠다. 잃은 것이 너무도 많아 상실이 무엇인지 뼈아프게 안 그들이었기에. 그녀가 저렇듯 절박하게 움직이게 된 것도 결국 상실 때문이었다. 동료들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것도 물론 괴로웠으나 혈육이 사라지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고통이리라. 그녀는 동생을 잃었다. 그 이후 그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졌다.
그 이후 그녀는 제 무력함을 탓하며 무기를 벼리고, 싸움을 거듭하고, 그리고, 그리고.
생각이 멈추었다. 저 멀리 익숙한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다. 끝이 해진 코트가 바람에 나부꼈다. 녹색을 띠는 머리카락도. 소년의 유일한 동료가 도시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적을 노리고 있었다.
*
소녀의 이름은 맹금을 의미했다. 선이 가는 몸은 언제나 깨질 듯 위태로웠으나 그녀는 그 이름에 걸맞은 뛰어난 사냥꾼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사냥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냥은 불필요했으며 침략당한 후 사람들은 모두 사냥감이 되어 쫓겼으므로. 사냥꾼을 자처한 침략자들은 저항조차 못하는 이들을 짓밟으며 그것이 유희라도 되는 양 웃었다. 모든 것을 잃고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한데 모여 침략자들에 항거하는 저항군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소녀는 사냥꾼이 아니었다. 그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전사였을 뿐이다.
싸움을 거듭하며 전사들은 차츰 강해졌다. 살아남기 위해 싸웠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 소녀는 유독 눈에 띄는 편이었다. 가장 위험한 패를 쥔 채 도박 같은 아슬아슬한 공격을 즐겼다. 적은 소녀의 그런 공격에 방심하기 일쑤였으나 열세를 반전시키는 소녀의 강력한 공격으로 결국 패하고 마는 것이다. 소녀는 그렇게 자신을 지키고 다른 이들을 지켰다. 그 가냘픈 뒷모습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소년은 소녀의 여윈 등을 보면서 자라났다.
그때도 소녀는 사냥꾼이 아니었다. 소녀가 사냥꾼이 된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던 날이었다. 상실을 거듭하며 잃은 것을 안고 걸어가는 그들이었지만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소녀에게 그것은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어느 날, 동생이 사라졌다. 적에게 끌려가 영영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소녀에게 그건 치유할 수 없는 상실이었다. 제 무력함을 탓하던 소녀는 마침내 선언했다. 그들은 괴물이라고. 그 잔학한 이들을 막기 위해서라면 같은 괴물이라도 되어 보이겠다고.
소녀는 제 말을 지켰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 스스로 괴물이 된 것이다.
“방어만으로는 부족해. 이제는 맞서 싸워야지.”
싸움을 이야기하는 소녀의 얼굴엔 표정이라곤 없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백지 같은 얼굴이 소년은 어딘지 두려웠다. 동생이 있어서일까. 소녀는 언제나 누이처럼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그 날부터 완전히 달라지고 만 것이다. 싸움 또한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처럼 버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완전히 짓밟으려 싸우게 되었다. 매서운 공격이 적을 삼켰다. 자비 없이 공격을 퍼붓는 소녀는 이미 적과 같은 사냥꾼이었다.
그럼에도 적은 빠르게 세상을 잠식했고 세상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살아남은 전사들의 싸움만으로 세상을 구해내는 건 무리였던 것이다. 잔해로만 남은 세상을 걷는 소녀의 뒷모습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꼭 쓰러질 것처럼. 유리로 조각한 새처럼, 언제든 날개가 깨어져 추락할 것 같았다. 그런 주제에 언제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언제나 날을 세우고, 언제나 무기를 벼리고, 언제나 적을 노리면서.
“슌은 전쟁이 끝나면 어쩔 생각이야?”
소녀가 돌아보았다. 표정 없이 핼쑥한 얼굴이 소년을 훑었다. 사실 그것은 도피를 위한 말이었다.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희망적인 미래를 굳이 그려보려 한 것이다. 그것을 안 것일까. 돌아오는 답은 짧았다.
“그런 것, 지금 생각할 이유는 없잖아.”
“그래도 슌. 생각해본 적은 있지 않아?”
극도의 절망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법. 때로는 행복한 과거로든, 쓰지 않은 미래로든 도피해야 했다. 그렇게 잠시나마 안식처를 찾는 것이다. 그것이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해도.
“사람들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건물을 다시 세우고, 그리고…….”
꿈을 꾸는 듯 느릿한 말. 그 얼굴에 평소의 긴장은 내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만하자, 유토.”
“왜 그래.”
“무의미하잖아. 이런 건.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는 한 상상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오히려 더 비참하게 할 뿐이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소년은 그것이 소녀가 너무 피폐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끝이 해진 코트는 그간의 고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으며, 앙상한 몸은 제대로 영양을 취하지 못했음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소녀의 정신일 것이다. 싸움을 거듭하고 상실을 거듭하며 세상처럼 황폐해졌으므로.
그 앙상한 뒷모습을 보며 소년은 세상에 불행을 불러온 적을 원망했다. 그것밖에는 하지 못하는 제 무력함을 저주하며. 침략자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이 세상에 희망은 없었다. 희망이 없으므로 꿈꿀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그려내는 미래는 무채색의 음울한 풍경일 수밖에.
“LDS쪽에서 나를 쫓는 모양이야.”
적을 해치운 소녀의 말에 소년은 과거에서 깨어났다. 이 세계에서 소녀를 상대할 사람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과 단순한 놀이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녀는 지금껏 실패 없이 습격을 거듭해왔다.
“위험하군.”
“좋게 생각하고 있어. 유인해낼 수 있으니까.”
“이걸로 정말 아카바 레이지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무의미한 싸움만 계속하는 건 아니야?”
“무의미한?”
소녀가 반문했다. 건조한 금빛 눈이 소년을 응시했다.
“무의미한 싸움은 없어. 유토.”
“방식이 잘못됐으니 하는 말이야. 말했을 텐데.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고. 그런데 넌 가능할지 아닐지도 모를 일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언제부터 우리가 방식을 따졌지?”
그 말에, 소년은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때 소녀는 무자비한 적을 연상시켜 소름끼친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나는 싸우기 위해서라면 뭐든 가리지 않아.”
“아카데미아와 같은 방식이라도?”
“그렇다면 그 외에 어떤 방식을 쓸 수 있지?”
소년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슬프게도 소녀는 옳았다. 그들은 적과 같은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부수고 모두를 빼앗은 방법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의 목을 조이기 위해서. 폭력이 폭력을 낳고 가해자가 가해자를 낳았다. 삶은 그렇게 아이러니하다.
소녀는 돌아서서 앞서나갔다. 언제나처럼, 무너질 듯한 모습으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년은 거리가 몇 걸음 벌어졌을 때에서야 황급히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소녀의 긴 그림자가 지면에 거인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
결과적으로 소녀는 옳았다. 잘못된 방식으로도 원하던 값을 출력할 수는 있는 모양이었다. 목표물이었던 수장과의 만남, 그리고 협력. 본래의 계획을 그대로 실현시키진 못했으나 적어도 희망을 찾았다는 건 분명했다. 다만 소년이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적진에 홀로 들어가겠다는 소녀의 결정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소년을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이라지만 가뜩이나 무모한 소녀를 홀로 내버려두는 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나는 아무래도 좋아.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올리는 소녀였다. 언제든 무슨 수단이건 사용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협력했다고 한들 여전히 적인 자의 본거지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그러나 끝내 소녀는 소년을 두고 떠났다. 사라져간 동료들처럼, 소녀의 뒷모습은 허망하게 사라졌다.
루리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소녀가 거듭하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루리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럴 수밖에 없어. 그래서 소녀는 적과 같은 폭력을 쓰면서까지, 죄 없는 사람들을 공격하면서까지 집요하게 목표물을 유인했던 것이다. 불행은 그녀를 황폐하게 했고 목적은 그녀에게 남은 것을 제 연료로 태워버렸다. 이제 소녀에겐 목적밖에 남지 않았다. 텅 빈 사람인 것이다.
만약 불행이 닥치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동생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까?
세상이 무너질수록, 동료가 사라질수록 소녀는 조금씩 피폐해졌다. 저를 갉아먹으면서까지 공격을 퍼붓고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워가는 것이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어느 날 말했다.
“어서 전쟁을 끝내자. 슌.”
“그래. 그래야겠지.”
소녀는 제 무기를 벼리며 건성으로 답했다. 언젠가부터 소녀는 싸움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을 끝내면 미래를 구할 수 있어.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이런 일은 없을 거야.”
“미래라. 그렇구나, 너는 미래까지 보고 있었구나.”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과거에 멈춰있는데 너는 미래까지 생각하고 있었어.”
“슌?”
“나는 전쟁을 끝낼게. 너는 미래를 구해줘.”
“함께해야지.”
소녀는 말없이 희게 웃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세상은 결국 종말을 맞았다. 그들조차 견딜 수 없는 날이 오고 만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소년은 절망했다. 그들의 불행은 너무도 짙어서 몇 사람의 저항만으로 감당해낼 수 없었다. 분함과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는 소년을 소녀가 잡아끌었다.
“여기를 떠나자, 유토.”
“떠나자니?”
“살아남아야지. 여기선 희망이 없어.”
여느 때처럼 덤덤한 목소리였다.
“우리라도 살아남아야지.”
“하지만 이곳을 버리고?”
“살아남아야 희망도 생기는 거야. 그래야 구할 수 있어.”
미래를. 속삭인 뒷말은 허공에서 흩어졌다. 소년은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것이, 누이처럼 자애로운 웃음이 그 얼굴에 걸려있었다. 소녀는 결국 언니였고 누나였고 어른이었다. 그렇게 병들고도 소년을 이끄는 것이다.
“걱정 마. 너와는 언제나 함께야.”
소녀는 상냥하게 속삭였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가물거리던 불안이 사그라졌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을 넘었다. 세상에 가득한 절망을 그들의 손으로 끝내기 위하여.
희망이 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병들대로 병든 자신들은 결코 희망 따위를 담아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세상에 그득한 절망이라도 걷어내고 싶었다. 그래야 미래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 이 세상에 오면서 그것만을 생각했고 그렇게 한 걸음 나아갔는데,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일까. 그녀의 병증을 알기에? 함께하는 이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텅 빈 그녀가 무너질까봐? 모를 일이다.
소녀는 적진에서도 간간히 소식을 보냈다. 그러나 그뿐. 그의 존재에 대해선 함구하며 만나려들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위험한 것은 저 혼자 짊어지기 위해서. 뿌리까지 병든 주제에, 목적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주제에. 소녀는 어리석을 정도로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려 그녀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러면 그녀도 그 위험한 곳에서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저를 몰아세우지 않고 조금은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 적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최악의 결말이 닥쳤다. 자신이 결국 그녀를 떠나게 된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것은, 언제나 위태로운 소녀의 뒷모습이었다.
*
언제나 검게 물들어있던 시야가 갑자기 개였다. 눈앞에 익숙한 뒷모습이 아물거리다 사라진다. 깨질 듯 위태로운 모습에 이름을 불러봤음에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제야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님을. 이것은 꿈이다. 자신은 이미 그녀와 닿지 않는 곳으로 와버렸기에, 지금 비치는 영상은 사념이 불러온 꿈일 뿐이다.
친우가 사라진 자리에 검은 매가 날았다. 날개를 다친 양 비행은 오래가지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기류에 몸을 맡긴 매가 추락을 멈추었다. 낮은 하늘에서 맴돌다 다시 저 창공으로, 창공으로.
아아, 너는 끝내 저 먼 곳으로 날아갔구나!
사랑하는 친우는 끝내 살아남아, 세상의 절망을 끊고 제 이름처럼 자유롭게 날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