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레이] ARK-RAY

현소야 2021. 6. 30. 06:08

 

  아버지, 세상이 파멸하는 꿈을 꾸었어요.

  왜였을까요? 분명 꿈속의 세상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얼굴엔 두려움 한 점도 없었는데. 고점을 찍은 롤러코스터가 추락하듯, 세상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파멸했답니다.

  거기서 전 공기가 너무 차면 터져버린다는 풍선을 떠올렸어요. 그때 모두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거든요. 즐거워서 미칠 것 같을 정도로. 어쩌면 너무즐거워서 뭔가 문제가 생긴 것처럼요.

  사람은 너무 행복할 때 무너지기도 하는 걸까요?

 

*

 

  언젠가부터 세상은 탄내에 휩싸였다. 서로를 겨누는 병기의 화약 냄새도, 병기 때문에 생겨난 폐허의 냄새도 탄내였다. 탄내가 체취처럼 스며들고부터 세상은 화려한 색채도 잃었다. 하늘도, 도시도. 인간의 눈에 담기는 거의 모든 것이 잿빛에 잠겼다. 여자는 세계에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진 게 오늘로 며칠째인지 헤아리려다 그만두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처참하게 다가올 뿐이다. 불길한 징조 하나 없이 갑작스레 시작된 파멸과, 그 날부터 무시무시한 속도로 무너져내린 모든 것들이.

  여자는 파멸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나날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일 년, 어쩌면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무너져내리며 시간 감각도 무뎌진 것일까. 여자는 <파멸의 날> 이후로 펼쳐진 날을 개월이나 주 단위로 세지 못한다. 일 단위로 세다, 세상의 붕괴가 오래지 않은 비극이었음을 확인하면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흩어버리는 그녀였다. 어쩌면 그렇게 날을 세는 것도 못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누구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으나 생존자모두 최악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완전한 파멸. 세계의 종말.

  희망보다 절망을 떠올리는 게 쉬운 건, 살아남은 이들이 전부 비관적인 사람이어서는 아니다. 되레 현실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무너진 건 인간이 다투어서가 아니라, 악마가 나타났기 때문. 인간의 공포가 되고 싶어 했던 남자가 몬스터와 결합해 괴물이 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인간 이상의 힘을 얻게 된 날부터 괴물은 세상을 파괴하고 다녔다. 블록으로 쌓은 성을 망가뜨리듯, 너무도 쉽게.

  그동안 쌓아온 문명도, 재난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온 기술도 악마를 자처한 괴물 앞에선 무의미했다. 괴물이 한 번 움직이면 무엇이든 장난감처럼 쉽게 무너져내렸다. 괴물을 몰아내기 위해 수많은 병기가 동원되었으나 괴물에게 타격을 입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나선 전사들이 두려움에 빠져 병기를 버리고 도망치거나 그 자리에 쓰러지는 일이 흔했다. 인간의 공포가 되기로 한 괴물은 두려움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서, 그것을 양분 삼아 몸집을 불렸다. 두려움으로 무장한 괴물이 공포의 대상이 되고, 그만큼 강력해져 다시 세상을 짓밟고. 그러면 다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악순환이었다.

  갑자기 찾아든 재난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힘으론 상대할 수 없는 위기란 점에서 괴물의 등장은 신화 속 멸망을 연상시켰다. 여자는 낡은 경전에서 그러한 재난을 몇 번이고 보았다. 저항할 수 없는 강대한 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파괴의 흐름.’ 세계멸망이란 정해진 결말보다 더욱 씁쓸한 부분은, 경전에 기록된 멸망이 인류의 불행이 아니라 신의 심판이라는 것. 어리석은 인간이 서로를 해하고 세계를 망가뜨릴 때. 신은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재앙으로 모두를 벌했다.

  그렇다면 세상을 파괴하는 괴물은 심판의 대행자인가? 그 악마에게 짓밟혀 먼지가 되는 것도 운명인가? 생존자 사이에 퍼지는 의문이었다. 누군가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면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고 일부는 그럴 리 없다며 화를 냈다. 여자는 굳이 의견을 내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도 하거니와, 주변 사람들처럼 명확하게 입장을 정하기 어려워서이기도 했다. 다만 한 번,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을 때, 그동안 머릿속에만 넣어두던 생각을 털어놓은 적은 있다.

  [자크가 신의 집행자라 여기는 무리도 세상엔 있는 모양이야.]

  세상에 스민 탄내가 지금보다 덜했던 날. 아버지는 악마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아버지의 시선은 연구소의 창 너머, 바깥에 얹혀있었다. 부녀가 지내는 연구소는 그나마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했으나 창 너머로 보이는 처참한 현실까지 막아주진 않았다. 바깥 풍경을 가리고 지내는 것도 가능했으련만, ‘은신처에 머문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두 사람은 끔찍한 풍경을 그대로 보는 걸 택했다. 아버지는 시시각각 무너지는 세상을 눈에 새기며, 세상을 절망에 빠트린 원흉을 화제로 올린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종말을 기다리기도 한다는구나. 덧붙이는 목소리는 침중했다.

  [저항을 포기한 거로군요. 버티는 것도 지쳐서일까요.]

  [……정말로 신이 인간을 벌하려 악마를 보낸 거라면 가장 먼저 심판당해야 할 건 나일 텐데. 사람들은 내가 희망이라도 될 줄 알고 있지.]

  자조가 비치는 말에 여자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 곁에 섰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절망스러운 풍경을 눈에 담는지, 어떤 심정으로 딸에게 말을 건네는지 전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본래부터 뛰어난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악마가 나타난 후로 더욱 역할이 커졌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비롯한 기술자가 악마를 몰아낼, 아니면 최소한 악마를 격리시킬 길을 찾아내길 바랐으므로. 부녀가 줄곧 연구소에 붙어있으면서도 몸을 피하고 있다고 비난받지 않는 것도, 세상이 아버지에게 기대를 걸고 있어서였다. ‘아카바 레오라면 답을 찾아낼 것이다. 인간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온 천재이니, 인간의 삶을 말려버리는 괴물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서 그러한 기대를 수없이 읽었다.

  물론 아버지는 이곳에서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악마를 단번에 날릴 병기를 만들지 못했을 뿐, 파멸을 늦춰줄 방어막을 꾸준히 세상에 내놓는 아버지였다. 그렇게 인류의 삶을 연장하고 있는데도 아버지는 자신의 성과에 도통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것만으론 부족해. 자크를 완전히 해체시켜야 하는데. 새벽까지 일을 놓지 못한 아버지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여자는 몇 번이고 들었다. 그럴 때 희미한 불빛에 비친 아비는, 핏기 없는 얼굴과 충혈된 눈 때문에 언뜻 광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악마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는 결벽적이었다. 단순히 악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악마라는 죄악을 세상에서 아예 지워내겠다고 결심한 듯했다. 그런 결벽적 태도는 위기감 때문만은 아니다. 기대의 대상으로서 모두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단 압박감 때문만도 아니다. 악마의 등장에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 가장 컸다. 한때 인간이었던 괴물을 악마로 만든 건 그와 결합한 몬스터였지만, 고작 배틀용 카드에 깃든 몬스터에 생명을 불어넣은 건 아버지의 기술이었다. 아버지는 악마가 싹틀 토양을 만들었단 죄책감에 빠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구나, 레이. 네가 보기에도, 자크가 신벌 같아?]

  그러니 아버지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배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본의 아니게 악마를 무장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세상을 짓밟고 다니는 자크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해? 다시 귀를 때린 물음에 그 날의 여자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답했다.

  [반반이에요.]

  [반반이라. 자크를 없애리란 희망이 조금은 있단 뜻일까? 그러면서 지금 우리가 겪는 일들이 인간의 잘못 때문이란 생각도 있는 거고?]

  [글쎄요, 전 자크를 심판자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 자는 그렇게 자처할지도 모르겠지만.]

  [듀얼에 리얼 솔리드비전을 접목하고, 그 자의 위험한 듀얼을 묵인하면서 이런 위기가 생기지 않았던가?]

  [화약 제조 기술을 익혔다고 모두가 병기를 만들진 않잖아요. 리얼 솔리드비전을 그런 용도로 쓴 건 자크뿐이었어요.]

  물론 그동안 사람들이 그 자를 부추겨온 건 부정하지 않지만요. 그러니까 반반인 거예요. 그렇게 말할 때 여자는 아버지와 같은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잿빛의 세상. 아직은 부녀를 삼키지 못했으나 언젠가는 그들도 먹어치우고 말, 파멸의 그림자에. 아버지에게 끝없이 죄책감을 안기는 악마의 흔적은 여자에게도 묵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아버지의 것과 닮은 감정. 책임감.

  [내가 한 일을 알고도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건 너뿐일 거다, 레이.]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손이 여자의 어깨를 감쌌다. 그것이 신뢰의 증거이자 의존이 깔린 행동이었음을, 그때도 지금도 여자는 안다. 아버지는 언제나 여자를 믿고 있다. 하나뿐인 가족으로, 어떤 순간에든 저에게 호의적인 사람으로. 때로는 유일한 동지.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후 아버지의 믿음은 깊어졌다. 그동안 기술자로서 세상에 기여해왔단 자부심으로 살아가던 그가 악마의 무대를 만들어주었단 자책에 휩싸인 탓이리라. 그렇지만 너는 나를 이해하겠지. 그 날, 아버지의 마지막 말에 섞인 기대는 아마 그러한 것이었으리라. 자기혐오가 깊은 만큼 커지는, ‘상냥한 사람에의 신뢰. 혹은 의존성.

  아버지의 굳건한 믿음이야말로 여자가 아버지 앞에 솔직해지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여자는 아버지가 저에게 매달리기 시작한 때부터 과거의 일에 대해 침묵하게 되었다. 파멸을 몰고 오는 악마가 한 인간이었을 때, 여자가 그를 보고 느꼈던 것. 그에게 걸었던 기대. 어쩌면 그를 염두에 두고 벌였을지도 모를 일들. 의도치 않게 그의 옥좌를 만들어주었을지도 모를, 여자의 행동. 꺼내는 순간 아버지를 침몰시킬지도 모를 것을 여자는 몇 개나 품고 있었다. 최소한 아버지 앞에서만은 땅에 들 때까지 고백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녀였지만, 이번에 마음이 바뀌었다.

  육성으로 꺼낼 수 없다면, 기록으로라도 남겨놓자고. 누구도 발견하지 못할 기록이 되어도 좋으니 그동안 혼자 삼켜온 걸 세상에 꺼내자고.

  태도가 바뀐 이유는 간단했다. 파멸이 너무도 가까워져서였고, 부녀가 지내는 연구소조차 이제 안전한 장소란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내일이라도 당장 무너질 것 같은 세상에 살면서 평생의 비밀을 꼭꼭 삼킬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삶이 끝나기 전에 진실을 풀어놓는 게 낫지 않을까. 여자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기억하는 악마, 아니, 악마가 되기로 한 인간에 대해 삼키고 싶지 않았다.

  결심이 선 여자는 연구소에 뒹구는 수첩, 과거 아버지의 연구일지였던 수첩을 꺼내 펼쳤다. 수식이 기록된 페이지를 촤르륵 넘기고 나니 쓸 수 있는 공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이유는 없다. 종이가 귀해지기도 했거니와, 남은 페이지를 다 쓸 때까지 그녀 자신이 살아남으리란 보장도 없으니.

  여자는 펜을 들고, 떨리는 손으로 첫 문장을 적었다.

  「이 기록은 끝까지 남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

 

  「이 기록은 끝까지 남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고픈 말을 다 쓰기도 전에 어떤 이유로 중단될지도 모르죠. 그런데도 쓰기로 한 건 남겨두기 위해서예요. 세계가 멸망하기 전, 우리가 가장 후회하는 것과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세계파멸에 본의 아니게 기여한 부분은 어느 것이었는지. 세계파멸이 당신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에겐 너무 쓰린 기록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지옥에서도 진실을 찾아야 하는 게 인간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아버지의 삶도 그 말을 지켜온 세월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니 이 기록을 넘겨보고 괴로워하는 일이 있더라도, 결국은 여기 담긴 이야기를 전부 받아들일 거라고도요. 누가 가장 먼저 발견할지도 모를 이 이야기를, 아버지가 읽을 거라 설정하고 쓰는 것은 그런 믿음 때문이랍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역시 리얼 솔리드비전 이야기겠죠? 자크의 무대를 만들어주었다고 수없이 자책하셨던 바로 그 <위대한 발명> 말이에요.

  아버지의 연구 성과에 모두가 박수를 치던 날을 기억해요. 리얼 솔리드비전은 아버지와 우리 주변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죠. 그야말로 혁명이었어요. 내가 승리에 너무 취해있는 건 아닐까. 언젠가 아버지는 조금 들든 얼굴로, 마찬가지로 들뜬 목소리를 최대한 차분하게 다듬어 말씀하셨어요. 그때 제가 그럴만한 승리였어요.’라 답했던 걸 기억하시나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요. 얼마건 도취되어도 좋을 승리였고, 위대한 성과였답니다. 그러니,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싶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리얼 솔리드비전을 어디에 새롭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딸인 저에게 물으셨지요. 그때 듀얼이 좋겠다고 답했던 건 제가 듀얼리스트여서만은 아니었어요.

  어려서부터 언제나 몬스터의 소리가 들렸어요. 종잇장에 불과한 카드에서 온갖 소리가 들렸죠. 듀얼 몬스터즈에 영혼이 있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모두가 살아 움직이는몬스터를 만났으면 했어요. 그럼 누구도 몬스터를 괴롭히지 않고, 동물을 키우듯 아낄 것 같다고 생각하고서요. 사람은 살아 움직이는 것에 언제나 의미를 부여하잖아요? 심지어 생명을 흉내 내는 안드로이드에게도 감정을 쏟고, 아껴줄 정도니까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악마, 자크도 시작은 그러했을지도 몰라요.

  왜 갑자기 그 남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느냐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전 세상에 아무 문제도 없었던 시절, 그 남자를 만난 적이 있거든요. 정확하게는 우연히 마주쳤다고 해야 하겠죠. 듀얼 대회에서 탈락한 그 자가 스타디움 밖에서 덱을 조정하는 모습을 어쩌다 보게 되었답니다.

  그 남자는 저와 동류였어요. 보자마자 알 수 있었어요. 소환된 몬스터에게 바짝 붙어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거든요. 우리는 말의 내용을 듣는 것으로 독백인지 대화인지 알 수 있잖아요? 그 사람은 분명히 대화하고 있었어요. 곁에 둔 몬스터와 말이에요. 이따금 몬스터를 돌아보는 눈길엔 애정이 담뿍 담겨있었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몬스터의 감정도 잘 이해하리라 생각했어요. 도구처럼 쓰지 않고 언제까지나 파트너로 여길 거라고요.

  판단이 틀렸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 남자에겐 분명 그런 미래의 가능성도 있었을 거예요. 제가 기대했던 가능성을, 가장 희망적인 길을 잘라냈을 뿐이지요. 이럴 때 저는 왜 신화에서 인간이 어리석은 자로 그려지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네요. 분명 좋은 미래가 있었는데, 누구도 다치지 않을 길도 존재했는데.

  그 남자도, 세상 사람들도. 가장 나쁜 길을 선택하고 말았던 거예요.

 

*

 

  스크린에 펼쳐진 세계전도는 8할 가량이 검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검은색 외에는 붉은색이 1, 나머지 1할만이 녹색이었다. 각각의 색이 의미하는 것은 악마에 오염된 정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세상을 무너뜨린 악마가 얼마나 침투했는지 색으로 표시한 것이다. 검은색은 악마에게 완전히 점령된 땅, 붉은색은 점령 위기에 놓인 곳, 녹색은 점령되지 않은 곳을 나타낸다. 뛰어난 기술자로서 악마에 맞설 길을 찾고 있는 사내는 검은색으로 물들다시피 한 지도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세상 곳곳에 방어막을 펼쳐 파멸의 시간을 늦추고 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기 그지없다.

  이대로라면, 오래지 않아 끝난다. 인류도, 세상도. 사내가 확인한 모든 사실이, 그의 눈에 담긴 모든 것이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죄 없는 이들을 바깥에 남겨두고 몸을 피한단 죄책감을 안고도 연구소에 틀어박혔던 건 이런 결과를 바라서가 아니었는데. 세상에 희망을 안기고 싶었던 사내는 순간순간 무력감을 느낄 뿐이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고, 누구도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절망과 함께.

  한때 사내와 함께 세상을 발전시켰던 기술자도 대부분 악마의 공격에 휩쓸려 희생되었다. 남은 이들이라고 의욕적으로 연구에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몇몇은 완전히 체념했고 몇몇은 드러내지 않을 뿐 사내처럼 무력감에 짓눌려 있다. 사람들의 기대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연구소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악마에게 뛰어든 사람도 있었다 사내는 그렇게 자신을 던진 동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듣지 못했다. 그의 연구실이 영영 주인을 잃게 되었으리란 것만 짐작할 뿐이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한 번도 품은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짊어진 것이 묵직할수록, 능력이 뛰어날수록 악마를 겪으며 느끼는 절망감도 깊었으니까. 간간이 쓰러질 정도로 연구에 매달리다가도 사내는 때로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날을 상상했다. 그나마 악마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에 가족을 데리고 도망쳐, 평생 숨어 살아간다면. 아니면 연구를 전부 내려놓고 정해진 결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무의미한 저항을 멈추고 운명을 받아들인다면 숨 막히는 절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럼에도 사내가 모든 걸 팽개치고 도망치지 못한 건 첫째로는 가족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죄악감 탓이었다. 그의 곁에 남은 유일한 가족인 딸은 아직 아버지를 믿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비가 계속 싸워가리라고. 그 믿음을 깨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살아갈 날이 긴 딸의 미래를 멋대로 닫을 수도 없었다. 둘이서 도피한다 한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보잘것없는 은신처에서 딸이 하루하루 말라가는 걸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워 딸을 지켜내는 게 아비로서의 책무이리라.

  거기에 사내는 악마가 날뛸 무대를 만든 죄인이기도 했다. 그가 자랑스레 세상에 내놓은 기술을 가장 악랄하게 사용한 이가 바로, 지금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마 정확히 말하면 한때 인간이었던 악마였다. 평범한 인간이 잔학함에 눈 뜨게 한 것도, 그 자극적인 모습으로 인기를 끌게 만든 것도. 결국 인간을 뛰어넘고 싶어진 그 자가 몬스터와 결합해 악마가 되게 만든 것도 사내가 발표한 기술이었다. 삶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며 세상에 바친 것이 도리어 모두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 셈이다. 악마의 등장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사내는 지금의 연구를 포기할 수 없다.

  악마의 발길이 닿은 곳은 죄 파멸해, 이제 세상의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다 해도. 인간이 희망을 걸어볼 곳은 아직껏 악마가 닿지 못한 극히 좁은 지역이라 해도. 거기서 사내의 머리를 스치는 의문이 있었다. 몇몇 지역에는 왜 악마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걸까? 어디로든 향해 반드시 파멸시키고 마는 악마가 왜 끝까지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이 있는 걸까? 그러한 청정지역의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악마를 쫓아낼 길도 생기지 않을까?

  모처럼 희망이 피었다. 걸어 잠갔던 연구실 문을 열고 나와 사내가 향한 곳은, 딸과 함께 연구소에 틀어박힌 후 거실처럼 쓰고 있는 휴게실. 사내가 연구실에 들어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면 홀로 남은 딸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했다. 사내가 그곳에 향하는 일은 많지 않았는데, 그것도 대부분은 쉬기 위해서라기보다 딸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찾는 것이었다. 이번의 목적도 그러해서, 사내는 휴게실로 걷는 내내 딸을 생각했다. 세상이 이렇게 무너지지 않았다면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을 젊은이. 아비와 함께 연구소에 스스로를 가두다시피 한, 그의 소중한 가족.

  그리고 그의 유일한 이해자.

  “, 아버지.”

  사내가 지켜야만 하는 사람은 휴게실에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내는 딸이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언가를 황급히 숨기는 것을 보았다. 비밀이 많을 나이였던가? 실없는 생각을 빠르게 지워내고, 사내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레이.”

  “. 말씀하세요.”

  “자크가 세상을 어지럽히기 전부터 너는 자크가 위험하게 느껴진다고 이야기했었지. 너만이 자크의 본질을 꿰고 있었던 것 같아. 그때 네 말을 귀담아들었다면 이렇게까지 모두가 불행해지진 않았을 텐데.”

  “아니에요. 저도 확신은 없었어요. 누구도 제대로 막아서지 못했던 것이니 자책하지 마세요.”

  아비를 다독이는 차분한 목소리에서, 아비를 향해 한 번도 원망을 얹은 적 없는 딸의 보랏빛 눈에서 사내는 안정을 얻는다. 세상을 뒤엎는 위기 속에서도 딸은 흔들리지 않았다. 모두의 기대를 안고 있는 사내보다도, 세상의 위기를 걱정한다던 엘리트보다도 더 굳건히 버티고 있다. 부녀의 관계에서 겉으로 상대방을 챙겨주는 건 사내였지만 실제로 둘을 지탱하는 건 어쩌면 딸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기에 사내는 언제까지고 딸을 신뢰할 수 있다. 악마가 날뛰기 전까지만 해도 프로 선수였던 딸에게 기술자 동지들에게보다도 더 많은 연구 정보를 털어놓는 건 아마 그래서이리라. 연구가 막힐 때, 혹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 사내는 오늘처럼 딸을 찾았다. 전문지식이 필요한 부분까지 전부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그럴 때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아비에게 답을 주려 노력하는 딸이었다. 딸과 이야기하고 나면, 사내는 어떤 식으로든 길을 발견했다.

  상황을 바꿀 길이든, 연구의 답이든.

  “자크의 위험성을 미리 알아챈 너라면 아마 자크의 습성도 이해하겠지. 아직껏 자크가 침입하지 못한 구역을 보고, ‘내버려두고 있는지 한 번 상상해볼 수 있겠니?”

  “그 남자의 심리를 따라가보라는 뜻이군요.”

  “불쾌하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

  “아니요.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셨는진 알겠어요. <안전지대>의 특징을 알아내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대피처를 더 만들려 하시는 거죠?”

  “그 이상을 바란다면?”

  사내는 회색 눈 가득 딸을 새기며 덧붙였다. 이 세상에서 아예 자크를 몰아내려 하는 거라면?

  처참하기 짝이 없는 상황임에도 한 번 희망이 피었다는 이유로 기적을 바라고 싶어진다.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걸핏하면 약한 마음이 드는 사내였지만 아직은 그도 절망에 다 먹히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동지이자 유일한 이해자인 딸은.

  “당연히 협조해야죠. 아버지.”

  이번에도 사내의 희망에 어울려주었다. 사내는 답을 듣자마자 딸을 데리고 연구실로 향했다. , 어떻게 생각하니. 레이. 스크린에 담긴 지도를 보여주며 사내는 물었다. 왜 자크는 이 구역들만 남겨두고 있을까? 정복자 행세를 하는 그 자답지 않은데. 뜻밖에도 딸의 시선은 스크린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안전지대를 대강 눈에 담아둔 딸은, 연구실 한 켠에 놓여있던 종이 지도를 꺼내왔다. 꾹 닫혀있던 딸의 입이 열린 건, 종이 지도 곳곳을 꼼꼼하게 확인한 후였다.

  “……역시.”

  짤막한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2음절의 말이 의미하는 건, 딸이 무언가 찾아낸다는 것. 그것도 처음부터 반쯤 짐작했던 걸 지도를 통해 확인했다는 뜻.

  “역시?”

  “자크는 인간의 욕망을 양분으로 삼지요. 기술이 발전한 곳, 인간이 모여든 곳은 자크에겐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될 거예요. 인간과, 인간이 쌓아올린 것들이 가득한 장소니까요. 세계의 대도시들이 가장 먼저 무너진 것도 그 때문 아니겠어요? 그럼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아직도 인간의 욕망에 오염되지 않은 곳은? 인간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곳은?”

  “더럽혀지지 않은 자연!”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사내는 외쳤다. 사내를 천재 기술자로 칭송받게 만든 그 어떤 발견도 지금 꺼낸 답만큼 그를 들뜨게 하진 않았다.

  악마가 침투하지 못한 지역은 모두 사람이 진입하기도 힘들 정도로 험준해, 자연이 거의 그대로 보존된 곳이었다. ‘정복을 꿈꾸며 찾아들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여럿이라고 했던가. 그 날것의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욕망이 스밀 수 없는 곳이며, 악마조차 짓밟을 수 없는 최후의 구역이었다. 왜 생각지 못했을까. 인간의 욕망에 반응해 힘을 키우는 악마가 인간이 닿지 못하는 곳에선 무력해지리라고. 누구도 짚지 못한 답을 찾아낸 딸이, 악마의 목을 죌 길을 알려준 딸이 사내는 꼭 신화 속 천사처럼 느껴졌다. 신의 뜻을 전하며 인간에게 희망을 열어주는 존재처럼.

  “이해했어, 레이. 인간의 욕망으로 더럽혀진 이 세상에 자연을 다시 피워내면.”

  들뜬 목소리로 외치자 딸이 그의 말을 완성해주었다.

  “자크라도 버티지 못하겠지요.”

  “이 폐허에 다시 자연을 쌓을 길이 있을까? 옛 이야기처럼, 황량한 땅에 씨를 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나?”

  “나무가 자라기까지 수십 년을 기다리긴 무리일 거예요. 자연의 힘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일이 쉬워지지 않겠어요?”

  “자연의 힘을……아직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힘을 끌어온다면, 안전지대의 자연을 담아올 방법만 있다면 전부 해결될 텐데. 무너지고 찢긴 세계에 그곳의 자연을 풀어내기만 하면.”

  “방법은 있을 거예요. 자크도 몬스터의 힘을 그대로 끌어와 하루아침에 세상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잖아요.”

  악마의 이야기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악마가 세상에 비현실적인 재앙을 뿌릴 수 있었던 힘. 그 이전에 평범한 인간이 몬스터와 결합해 괴물이 될 수 있게 한 것. 사내에겐 익숙하다 못해 그 바탕까지 낱낱이 이야기할 수 있는, 한때 세상을 열광시켰던 기술. 답을 막 꺼내려던 때 사내는 딸의 얼굴에 감격이 서린 것을 보았다. 딸 역시 떠올려낸 것이 분명했다. 높은 확률로 사내와 같은 것을.

  부녀의 시선이 엉켰고, 두 사람은 같은 답을 뱉어냈다.

  “리얼 솔리드비전.”

  사내가 세상에 내놓은 가장 놀라운 성과이자, 악마가 싹틀 토양을 만들어준 기술. 카드 속 데이터를 질량을 가진 사물로 실체화시키는 기술. 악마는 배틀용 카드 속 몬스터의 힘으로 세상을 부수지 않던가. 자연을 에너지화하여 카드에 담고, 사내의 기술로 자연의 힘을 온 세상에 펼쳐내면. 악마를 몰아내는 건 물론, 종말을 앞둔 세상에 생명을 싹틔우는 것도 가능하리라.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사내는 비로소, 세상에 재난을 가져온 죄인이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웅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내가 낳은 죄로 모두를 지켜내자. 그 순간 사내의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

 

  「자크가 인기를 얻기 시작한 때, 꿈을 꿨어요. 자크의 무대를 관람하는 꿈을요.

  객석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모두의 얼굴엔 부풀어 올라 터질 것 같은 기대가 비쳤답니다. 불길한 징조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보통의 듀얼 경기였죠. 그런데 갑자기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세상이 파멸하더군요. 순식간에 땅이 검은색으로 말라붙고 건물이 종잇장처럼 뜯겨나가는데 사람들도 하나둘 검은색 재를 덮어쓰고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리는 거예요. 너무 비현실적인 종말이라 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도 없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이 이렇게 무너질 줄 누구도 몰랐는데, 왜 하필 불길한 꿈을 꾼 걸까요? 왜 꿈속의 세상은 꼭 지금을 예언하듯 허망하게 무너져내렸을까요?

  그때는 비명의 정체를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꼭 예언 같은 꿈을 수없이 되새긴 끝에 파멸의 시작을 알린 비명을 누가 질렀는지 눈치챌 수 있었답니다. 그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어요. 몬스터의 울음이었죠. 리얼 솔리드비전을 통해 실체가 생긴 몬스터 말이에요.

  울음이라는 표현을 보고 울부짖음을 생각하셨겠죠.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건 단순한 울부짖음이 아니었어요. 습관적으로 흘리는 소리가 아니라,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울음이었거든요. 꿈속의 몬스터는 괴로워하고 있었어요. 동시에 분노하고 있었죠. 무엇에 괴로워하고 분노했는지 그 날의 꿈에선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잖아요?

  인간의 욕망, 타자를 해하고, 끌어내리고, 짓밟고 싶은 사악한 욕망.

  자크는 분명 몬스터의 울음을 들었을 거예요. 제가 꿈속에서 들었던 것 같은, 그런 울음을요. 이전에도 그 남자의 듀얼을 보면서 이야기했었지요. 몬스터가 분노하고 있다고요. 제가 과거에 보았던 자크라면, 몬스터와 대화했던 그 남자라면 자기 파트너의 울음을 못 들었을 리 없어요. 아마 듣고도 무시했겠죠. 아니면 멋대로 해석했을지도 몰라요. 자기가 몬스터의 분노를 끌어안아, 인간을 대신 짓밟아주겠다고요.

  그토록 아꼈던 드래곤 4체와 스스로 결합했던 걸 생각하면 후자였을 가능성도 충분할 것 같군요.

  확실한 건 그 남자가 몬스터의 분노를 잠재우지 않았다는 겁니다. 감싸기는커녕 그 힘으로 세상을 계속 짓밟고 있지요. 아직도 간간이 몬스터의 울음을 듣는데, 분노와 괴로움 이외에 두려움도 비치는 것 같아요. 그의 파트너이자 심복이었던 몬스터들조차 그에게 공포를 품는 것일까요. ‘변해버린파트너에게, 아니면 자크라는 거대한 악의에? 어느 쪽이건, 자크가 타자를 해하고 악의를 두르는 한 몬스터의 울음이 그치는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누구도 다치지 않을 길이 있었음에도 가장 나쁜 길을 선택했다고 적었지요. 자크도, 세상 사람들도. 사람들의 과오가 자크에게 무대를 마련하고 그의 타락을 극한까지 관람한 것이라면, 자크의 잘못은 자신의 욕망을 인간의 욕망으로 덮어버린 것이라 생각해요. ‘인간의 욕망에 기대는 게 자신의 욕망을 쉽게 채우는 길이기에 추한 욕망을 그대로 덮어썼겠지만, 결국 그걸 벗고 나오지 않았잖아요. 어느 순간 <인간의 욕망>을 제 것으로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오래된 욕망 정점에 올라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단 욕망에 스스로 갇혀버린 것인지.

  깊게 들여다볼 생각은 없어요. 패왕룡 자크라는 재앙이 닥친 현실은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이제 자크는 관객이 통제할 수 있는 광대가 아니라 모두를 덮치는 재난이지요.

  자크를 이용해 욕망을 채우려던 사람들과, 자기에게 향한 욕망을 치장인 양 둘렀던 자크. 모두 욕망을 잘못된 방식으로 과도하게 추구했다는 죄를 안고 있지요. . 결국은 인간의 죄로군요. 지금 우리 세계는 신벌이 떨어졌다 해도 놀랍지 않을 곳이에요. 단지 자크가, 몇몇 사람들의 믿음처럼 심판의 대행자가 되지 못할 뿐이에요.

  차라리 신벌 그 자체라면 모를까.

 

*

 

  펜이 수첩 위에서 삐걱거렸다. 여자는 펜촉의 잉크가 만든 검은 얼룩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수첩에 문장을 쓰던 중 갑자기 손이 떨린 건 무엇 때문일까. 신벌이라는 묵직한 단어? 거기에서 연상되는 처참한 결말? 그게 아니라면, 글을 쓰다 독자로 상정한 이에게 생각이 닿은 탓일까. 여자가 홀로 삼켜온 이야기를 풀어내는 수첩은 본디 아버지의 연구일지였고, 누군가 수첩을 발견해 지금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첫 독자는 높은 확률로 아버지일 터였다. 여자가 머무는, 동시에 몸을 숨기는 연구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녀 둘이서 지내던 곳이었으니까.

  악마가 나타난 후로 줄곧 여자와 함께 연구소에 머물던 아버지는, 희망을 찾아 먼 곳으로 떠났다. 인간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날것의 자연에서, 인간을 구제할 힘을 추출하기 위해서. 인간의 욕망과 대조되는 자연의 정수를 에너지화해 카드에 담아오는 게 아버지의 목표였다. 생명을 틔우는 꽃. 하늘과 땅을 오가며 생물을 이어주는 새. 모든 것을 움직이는 바람. 공전하는 달 부녀가 꼽은 대표적인 자연을 끌어와 이 세계에 펼쳐낸다면, 악마도, 악마가 낳은 악몽도 걷히리라.

  어떻게든 자연의 카드를 만들어오겠다며 떠난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지역이 지역이니만큼 연락은 되지 않으며, 홀로 떠났으니 험준한 자연에서 몸을 다치더라도 치료해줄 사람 하나 없다. 아비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도 모르고 여자는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한 겹 은신처인 연구소에서, 주인 잃은 기계들에 둘러싸인 채. 그동안 서로 의지해온 상대도 없이, 혼자.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 아버지에게 생각이 닿으면 초조해졌다. 오염되지 않은 만큼 위험한 자연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 해도, 연구소로 오는 길에 악마와 마주치지 않는단 보장은 없다. ‘바깥의 사람들처럼 허망하게 휩쓸리게 된다면. 겨우 만들어낸 희망을 꺼내지도 못하고 쓰러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장면에 여자는 몸을 떨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지.]

  떠나기 전, 함께 가자는 딸의 요청을 거절하며 아버지가 꺼낸 말이었다.

  [자크를 물리칠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너는 안전한 곳에 있으렴. 내게 뭔가 문제가 생기더라도 자연에너지 카드는 꼭 이곳으로 보내마. 그렇게 여자를 달랜 아버지는 그대로 연구소를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더라. 날을 일 단위로만 세는 여자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숫자는 순식간에 두 자리 수가 되고, 십의자리가 커지고. 여자는 입술을 깨문다. 막연히 생각하던 것보다 더 길었다. 앞으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알 수 없는데. 연결이 잘 되지 않는 통신이라도 시도해볼까 생각한 때.

  여자는 연구소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수첩을 빠르게 숨긴 여자가 연구소 입구로 향하기 전, 그녀가 머물던 휴게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여자가 줄곧 기다려온 자.

  “돌아왔어, 레이.”

  피로에 짓눌린 얼굴로 아버지가 인사를 건넨 때, 여자는 말없이 아버지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짐을 내려놓자마자 쓰러지듯 잠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건 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아버지가 몸에 새겨진 상처를 확인한 것도 그때의 일. 깊은 상처가 아닌 것에 안도하며 여자가 간단히 상처를 치료해줄 때, 아버지는 메마른 목소리로 그간의 일을 읊었다. 그렇게 마지막 카드를 만들 수 있었지. 그때 발을 헛디뎠는데 다행히 바위가 많은 쪽이 아닌 풀숲에 떨어지더구나. 죽을 위기를 그렇게 또 넘겼어.

  “이 정도로만 다치고 돌아오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기도가 통한 모양이야. 이번 일만 끝낼 수 있게 해달라고, 수없이 빌었어. 내가 저지른 죄는 내가 끝맺을 수 있게 해달라고. 그게 의 완성일 거라고.”

  “아직도 자크의 일이 아버지 때문이라 생각하세요?”

  “기술자라면 자기가 세상에 내놓은 것에 책임을 져야 해.”

  “책임은 이미 충분히 졌어요. 자크를 물리치는 것까지가 책임이라 생각하신다면, 자크의 위험성을 알고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은 저에게도 책임이 있고요. 그러니 인간의 죄를 혼자 감당하려 하시지 말고, 마음을 조금 편하게 가지세요.”

  여자의 위로에 아버지의 입술은 꾹 닫혔다. 딸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처럼. 군데군데 붕대를 감은 손으로, 아버지는 자꾸만 카드만 만지작거렸다. 4장의 카드. 자연의 정수가 담긴, 인류의 희망이 될 카드를. 거기서 여자는 악마에 대한 아버지의 결벽적 태도를 떠올린다. 죄책감에서 비롯된, ‘인간의 재난을 전부 끌어안으려는 태도. 쌓아온 모든 것을 투자해서라도 세상에서 악마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는 모습.

  여자는 아버지의 그런 결벽성이 존경스러운 한편 안쓰러웠다.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그동안 를 지나치게 자책해온 아버지가, 악마를 세상에서 지워낸다는 목표에 투신하다 미래를 잃게 될까 봐. 아버지에게 그녀가 유일한 가족이자 동지인 것처럼, 그녀에게도 아버지는 잃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간 온갖 빛나는 발견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사람이며 세상에 다시 미래를 쌓아야 할 기술자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가, 악마를 안고 침몰하려 할까 봐 여자는 자꾸 두려워진다.

  연구소로 돌아온 날부터, 아버지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더욱.

  자연에너지 카드를 만든 이후 아버지는 그나마 연락하던 생존자들과의 연락을 차례로 끊었다. 친밀했던 이들에게 통신을 걸어 이제 연락처를 지우라고 말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다음으로는 오랜 시간을 들여 개발했던 기술과 장치의 자료를 딸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이걸 왜 제게 주세요? 조심스레 묻자 소중히 여겨줬으면 한다는 답만 돌아왔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하기엔 아버지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너무도 쓸쓸했다. 그건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나 지을 웃음이었다.

  “디스크를 이렇게 켜던가?”

  아버지의 자료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여자는 불쑥 들려온 말에 돌아보았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너무도 익숙한 물건을 들고 서 있었다. 배틀용 디스크. 한때 프로 선수로 무대에 올라 배틀에 참여했던 여자가 쓰던 물건. 마찬가지로 프로 선수였던 악마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모델이기도 했다. 잃어버린 과거를 떠올린 여자가 감상에 젖은 때, 아버지는 딸의 옛 물건을 슬그머니 왼팔에 장착했다.

  “어색하구나, 이런 건.”

  “……사용하시려고요?”

  “언젠가 쓰게 될지도 모르잖아.”

  프로 시절 여자는 디스크에 카드를 세팅해 살아 움직이는몬스터를 무대에 세우곤 했다. 동시대의 프로였던 악마 역시, 인간이었던 때 디스크를 통해 제 파트너인 드래곤들을 불러냈다. 카드에 담긴 모든 것을 현실로 끌어내는 수단이 디스크란 점에서 아버지의 설명은 수상쩍다. 기술자인 아버지가, 이제 과거처럼 몬스터를 무대에 세울 일이 없는 상황에 디스크를 써야 할 이유가 있나? 디스크를 꼭 필요로 할 일이라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쯤이요? 자크 앞에서 자연에너지 카드를 사용할 때요?”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역시 레이는 날 꿰고 있는걸.”

  “왜 아버지가 사용하시려는 거죠?”

  “말하지 않았던가? 기술자는 자기가 세상에 내놓은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 때문에 시작된 일은 내가 끝맺어야 해. 그게 올바른 행동이겠지.”

  “카드를 사용하는 것만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잖아요, 예를 들어…….”

  “레이. 우리가 쥔 희망이 인간의 욕망에 대조되는 자연의 힘이란 건 알고 있겠지. 사용한다면 자크와 결합한 드래곤을 흩어버리고 자크를 무력화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사용자인 우리도 인간이니만큼 인간의 욕망을 해체하는자연의 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차분한 설명에, 아버지가 그리는 미래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졌다. 카드를 쥔 때부터 주변을 정리해온 이유도. 날것의 자연을 감당해낼 수 없는 건, 인간의 욕망을 먹어치우며 몸집을 불린 악마만이 아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걸 맨몸으로 받아낼 수 없다. 사용하는 순간, 아마도.

  “다시는 이전 같은 삶을 살 수 없겠군요.”

  단순히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연의 힘을 담아낼 그릇이 되어 자아를 잃거나, 아예 흘러가는 자연에 흡수될지도 모른다. 폐허가 된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되살리고 악마를 물리치는 대신 나의 삶은 영영 잃게 되는 것이다. 씁쓸한 결말을 여자가 몇 갈래나 그릴 때도 아버지는 <진짜 결말>을 이야기하는 걸 피했다. 그런 걸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순 없잖아. 라고, 여자의 말에 일부 동조해줄 뿐.

  “그렇게 나쁜 결말은 아닐 거야.”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에 위로하듯 덧붙인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딸의 얼굴에 괴로운 감정이 뚜렷하게 비쳤기 때문에?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밀려드는 비참함에 도무지 입을 뗄 수 없었다. 여자는 도망치듯 아버지에게서 돌아서,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지금 자신을 덮친 감정이 슬픔인지 두려움인지도 짚지 못하고. 복도를 걷는 내내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여자는 돌아보는 대신 유리창 너머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쉼 없이 무너져내리는 세상. 악마가 날뛰는 세상에.

  머잖아 저 세상에선 어둠이 걷히게 되리라. 그 대신 세상은 누군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누가 될지는, 아직 선택할 기회가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괴롭게 밀려들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걷혔다. 여자는 세계의 운명에 자신도 관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

 

  「신벌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감상적이지요. 불행의 핑계를 신에게서 찾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죄가 몰고 온 재난에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기도 해요. 자크의 시대를 사는 지금 사람들에겐, 신벌이라는 말이야말로 운명의 이름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운명이요.

  신을 믿는 이에게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건 심판이 떨어지기 충분한 시대이지요. 신화에선 언제나 인간의 욕심이 극에 달할 때 어리석은 인류를 벌하니까요. 우리 세대는 그릇된 욕망을 감추지도 않고 추구한 끝에 패왕룡 자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자크가 심판의 대행자라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 자가 세상을 신화 속 심판처럼 파멸 직전으로 몰고 갔지만, 저는 그에게 심판자란 이름은 줄 수 없어요.

  굳이 따지자면 그 자는 재앙을 뿌리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재난 그 자체지요. 동시에 신이 징벌해야 할 죄인이기도 합니다. 그야, 자크도 욕망으로 탄생한 존재인걸요. 인간의 욕망이 그에게 힘을 불어넣었다고 모두를 지배하겠다는 그의 야망이 없던 것이 되나요? 그 자가 자신의욕망에 휩쓸려 몰고 온 파멸에서, 지금 우리가 겪는 재난에서 그의 죄만 지워줄 수 있나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인과 죄인이 맞서고 있을 뿐이에요. 어느 쪽이 먼저 죄를 뉘우치고 이 불행을 끊느냐가 문제죠. 악마를 자처한 인간에게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어쨌건 아직도 인간이 자신을 불렀다고 주장하는 존재니까요. 자크에게 그만한 힘을 준 사람들이라고 믿음이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엔 인간의 죄를 깨달은 이들이 아예 없지는 않아요. 절망하고 두려워하다 무너지는 게 아닌, 세상을 덮친 재앙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게 아닌. 재앙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명확히 알고서, 상황을 바꾸려는 사람들이요.

  자연의 힘을 써 자크를 물리친다면, 폐허가 된 세상에 다시 자연을 피워낸다면. 그런 사람들이 미래를 쌓게 될 거예요. 다시 문명을 쌓고 기술을 발전시키겠지만 인간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겠지요. 자크의 등장에 책임을 느끼고 지금껏 그 자를 막아내려 한 아버지라면 충분히 <미래를 만드는 자>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

 

  연구실 책상에 낯익은 물건이 올려져 있었다. 악마가 날뛰기 전 사내가 사용했던 자그마한 수첩.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연구일지. 어떻게 발견했을까 하는 의문보다 옛 자료를 찾아냈단 기쁨이 먼저 찾아든 사내였다. 그에겐 이제 큰 의미가 없다고 해도, 딸에겐 추억으로든 연구자료로든 남겨둘 가치가 있는 수첩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곧 돌아오지 못하게 될 아비의 유품으로도.

  사내는 마지막 날을 미리 정해두었다. 자연에너지 카드를 사용해 악마를 막으러 나서는 날. 아마 그의 미래가 닫히는 날을. 자연에너지 카드는 자연의 정수를 담아낸 카드. 인간이 자연 그 자체를 감당해낼 순 없다. 카드를 사용한 순간 인간으로서의 삶은 끝난다고 봐야 하리라. 딸에게 카드의 효과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악마를 물리친 미래에 당연히 아비도 놓고 있을 딸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딸은 살아갈 날이 긴, 미래를 상징하는 젊은이였다. 세상을 구해내기만 한다면 악마가 지나간 자리에서 자기 미래를 하루하루 쌓아갈 힘이 충분한 사람. 그런 딸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사내 혼자만 감당해야 한다. 악마가 나타난 후로 불행도 고통도 딸과 나눠온 사내였지만 희생까지 함께할 수는 없었다. 저번에 사내가 언뜻 희생하겠단 의사를 흘린 후로 딸은 아버지를 막으려는 듯 그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지만, 그가 언제 악마를 막을 무기를 들고 나설지는 모르는 듯했다.

  알아서는 안 되었다. 세상을 위한 희생이라 해도, 악마의 무대를 만든 죄인으로서 속죄하려는 것이라 해도, 딸은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세계를 구하려는 아버지를 막아서거나, 막지 못해 눈물짓거나. 어느 쪽도 사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므로, 그는 속죄의 날을 딸에게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그 날까지는, 하나뿐인 가족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동안 의지해온 딸에게 마음을 전하는 건 물론, 함께하는 시간도 최대한 마련해야 했다. 최근 들어 사내가 연구실 대신 휴게실에 주로 머무는 것도, 딸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딸에게 아비의 일을 이야기해주고 싶어 삶을 빛냈던 기술이나 자신이 개발한 장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요즘 사내의 일상이었다. 기술자나 연구자의 길을 희망하진 않을 텐데도 딸은 언제나 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아비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어서인지.

  그런 딸에게 해줄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찾아낼 수 있을까 싶어, 사내는 오랜만에 발견한 연구일지를 펼쳤다. 기억에 남은 수식과 메모를 하나하나 훑다가, 사내는 제 것이 아닌 글씨를 찾아냈다. 딸의 필체로 쓰인 문장은 대충 넘겨봐도 몇 페이지나 적혀있었다. 종이가 귀해진 상황에서 무언가 기록할 게 있었던 걸까? 별생각 없이 딸의 글을 읽기 시작한 사내는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그동안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딸의 심리가, 고백이 묵직하게 담겨있어서였다.

  왜 지금까지 딸의 생각을 읽으려 하지 않았을까. 세상을 덮친 재난에 함께 괴로워하고 고뇌한 사람이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가 아니라 그의 짐을 나눠 짊어질 정도로 성숙한 인간이었는데. 이렇게 무거운 말을, 글로 남기지 않게 했다면 좋았으리라. 서로의 감정을 소리 내어 이야기하고, 미래에의 계획을 공유했다면. 그랬다면 사내는 딸이 슬퍼할 것을 걱정하지 않고 딸은 악마에 대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홀로 품지 않았을 텐데.

  한동안 보이지 않던 연구일지가 연구실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던 것도 딸이 일부러 준비해둔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감으로. ‘떠나기 전아버지가 읽어주길 바라고서. 사내가 설정해둔 마지막 날까진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다. 딸을 찾아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충분하다. 네가 담아둔 것을 읽었다고. 네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다고. 그러니 악마를 물리쳐 네 마음의 짐을 덜어주겠다고, 지금이라도 이야기한다면

  생각이 끊어졌다. 갑작스레 문이 열리더니 딸이 연구실에 들어와 사내가 준비해두었던 무기, 자연에너지 카드를 낚아챈 것이다. 급습하듯 일어난 일에 사내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상황을 파악한 때는 이미 그가 사용해야 할 카드가 딸의 손에서 덱케이스로 넘어간 후. 카드를 확보하자마자 뛰쳐나간 딸이 디스크를 챙긴 것을 보고서야 사내는 다음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의 계획을 딸이 전부 넘겨받는 것. 아비의 희생을 바라지 않은 딸이 카드를 사용해 악마를 막아서는 것.

  결심이 서면 물러서는 법이 없는 딸을 막기 위해, 사내도 달려나갔다. 딸이 미래를 잃는 일이 없기만을 바라며. 연구실을 떠나, 연구소를 빠져나와, 악마가 모든 것을 짓뭉개는 바깥으로. 부녀가 떠난 자리에는 수첩만이 휑하게 남아, 아비가 미처 읽지 못한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고 있었다.

  「저는 아버지를 대신하러 가려 합니다. 이건 아버지를 위해서이지만 세상을 위해서이기도 해요.

  신화에선 신벌을 내릴 때 미래를 위한 희망을 남겨두죠. 새로운 세계를 쌓을 사람을, 미래를 품은 씨앗을 소수나마 보존하곤 해요. 그렇게 희망을 실은 방주 덕에 신화 속 인류는 심판받고도 계속 살아왔지요.

  인간의 욕망으로 오염된 이 세계가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방주가 필요할 거예요.

  아버지. 그러니 희생해선 안 돼요. 기술과 지식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품고 살아가세요. 당신 머릿속과 가슴에 남은 걸 끝까지 안고, 미래를 쌓아주세요.

  방주가 되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