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슌] 죽음의 잇자국
어려서부터 소년은 언제나 죽음에 휩싸여 있었다. 죽음은 소년을 사랑하여 소년의 세계 구석구석에 스몄던 것이다. 그 저주와도 닮은 사랑을, 소년이 알 리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을 쏟은 생명은 죽어버렸다. 어릴 적 부모님이 데려오신 고양이가 그 시작이었다. 아끼고 사랑하여 정이 깊어졌을 무렵, 고양이가 무채색으로 보였다. 피로해서 잘못 본 것일까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여전히 무채색이었다. 제게 몸을 비비며 가르릉대던 고양이만이 화사한 세상 속 잿빛이었다.
오래지 않아 고양이가 죽었다. 사랑하던 것을 잃어 슬퍼하긴 했으나 소년은 자신에게 죽음이 매달려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 소년에게 죽음은 머나먼 곳의 타인에게나 닿는 불행이었으므로. 다만 죽음은 그 날부터 조금씩 소년의 세상에서 세를 넓혀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이었다.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죽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친구의 장례식에서 소년은 떠올렸다. 그 며칠 전, 친구가 무채색으로 비쳤다는 것을. 아름답게 빛나던 세상 속 홀로 채도를 잃은 양 음울한 잿빛으로 물들었었다는 것을.
마치 죽음을 예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이후로도 소년의 근처에선 많은 것이 죽었다. 마음을 쏟은 것이라면, 이따금 먹이를 주던 동물이건 친하게 지내던 친구건 좋아했던 선생님이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직전에는 꼭 죽음이 얄궂은 예고를 하는 것이다. 이제 그것이 소년의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리라고. 색채를 잃고 종결되게 되리라고. 그 대상에 무채색을 끼얹으면서.
꼭, 죽음이 그들을 질투하여 지워내는 것처럼.
참혹한 상실도 거듭되면 익숙해지는 것. 소년은 사랑하는 것을 잃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죽음에 조금씩 덤덤해졌다. 그럼에도 거듭된 죽음이 소년에게 남긴 상처가 있다면,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 것이리라. 마음을 쏟으면 죽는다.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 소년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정을 붙이면 잃게 된다고. 그것이 자신을 끝까지 따라다닐 잔혹한 저주라고. 그렇다면 차라리 어디에도 정을 붙이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무것도 잃지 않도록.
그리하여 소년은 함부로 애정을 쏟지 않게 되었다. 어떤 대상에든 정을 붙이면 무슨 결과가 돌아올지 인식하고 있었기에. 죽음은 그렇게 소년의 삶에서 제 존재를 확보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것일까. 죽음은 어느 날 소년의 세계에 지독한 재앙을 가져왔다. 수많은 이들을 제 품으로 되돌리는, 전쟁이라는 재앙이었다.
세상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잔해만이 남은 세상은 지독한 무채색이었다. 매일같이 사람이 사라졌고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잿빛의 절망이 채웠다. 상실이 일상이 되는 삶 속에서 소년은 잃은 것을 돌아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실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헤아릴수록 비참해지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이 죄 없는 이들에게 닥친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무력하게 죽어나갔다. 그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을까. 삶을 채우는 죽음 속에서 소년은 깨달았다. 죽음은 자신을 휘감아 그 곁의 사람들을 전부 앗아간다고. 죽음의 먹잇감은, 이 세상 전부였다고.
죽음은 삼키는 것마다 무채색으로 바꾸었고 세상은 구석구석 무채색이었으니, 소년은 자신이 결국 전부 잃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럼에도 소년은 그 운명적인 저주에 순응하기 싫어 저항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소년의 미래는 규정되는 것이 아닌가. 그 무엇도 남지 않은 황량한 폐허로. 죽음의 손길에 하나같이 말라붙은 음울한 세상으로. 그것을 차마 용납할 수 없어 소년은 침략자와 싸우고, 싸우기 위해 인간다움을 포기하고, 침략자와 같은 괴물이 되기까지 했다.
그렇게라도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죽음의 저주는 이미 지긋지긋했다. 사랑하는 것마다 잃었는데, 죽음은 더 나아가 그를 둘러싼 세상을 고사시킬 기세였으니. 어렸을 때는 그 악독함을 몰랐으나, 소년은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지독하게 사람을 괴롭히며 얼마나 집요하게 따라붙는지. 그리고 어떻게 침투하여 세를 키우는지.
어릴 때부터 반복된 수많은 죽음은 소년이 자신에게 향한 죽음의 집요한 집착을 인정하게 했다. 죽음은 소년을 둘러싼 것이라면 무엇이든 평등하게 앗아가면서도 소년은 털끝 하나 건드리는 일 없다. 대신 언제나 소년에게 따라붙었으니, 소년은 지금껏 죽음을 불러오고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은 자괴를 부르고 자괴는 자기혐오를 불렀다. 소년은 자신의 세상을 죽음으로 물들인 자신을 괴물이라 생각했다. 차라리 자신이 사라졌으면 좋았을 것을. 모든 저주를 떠안은 채 질식했으면 행복했을 것을.
죽음의 손길이 닿은 세상에서 희망은 남김없이 말라붙었으므로, 소년은 희망을 찾기 위해 세상을 뛰어넘었다. 죽음의 저주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동료와 함께였다. 그들은 이세계까지 닿아 세상을 복구시키고 죽음을 몰아내기 위해 투쟁했다. 가망 없는 싸움을 거듭하면서도 살아남아 함께하게 된 이를 보며 소년은 소망했다. 제발 그만은 앗아가지 말라고. 죽음을 저주하며 기원했다. 더 이상 소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게 해달라고. 그마저 빼앗기면 이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모든 것을 앗아간 죽음이지만 단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그만은 남겨두기를 바랐다.
소년에겐 너무도 절박한 소망이었다. 극도의 절망 속에서도, 거듭되는 죽음 속에서도 부른 적 없었던 신에게 기원을 올렸던 것은 그래서였다. 이번만은 죽음의 장난을 허락하지 말아달라고. 만일 그가 죽음을 짊어져야 한다면 그 대신 자신에게 안겨달라고. 슬플 정도로 소박한 기원이었다.
기원이 통한 것일까. 한동안 죽음은 소년을 괴롭히지 않았다. 동료는 쭉 그와 함께했으며, 두고 온 세상에선 찾을 수 없던 희망까지 이세계에서 찾게 되었다. 협력자를 만났고, 그가 구상한 정예병과 함께 싸우자는 제안까지 받았다. 만일 일이 잘못되더라도 홀로 감당하겠다는 각오로, 소년은 단신으로 협력자의 기지에 들어서기로 했다.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를 일이었으나 소년은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기뻤다. 작전을 위해 떠나는 소년을 동료는 따스하게 배웅했다.
“그럼, 슌. 몸조심하고, 무모한 짓은 절대 하지 말고.”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동료는 가족처럼 꼼꼼하게 소년을 걱정했다.
“알겠다고 몇 번을 말해.”
“네가 이 세계에서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이만큼 당부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는 것 같다만.”
“너만 괜찮으면 돼. 유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슌.”
무사히 돌아오라는 소망을 담아, 동료는 멀어지는 소년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보였다. 마지막까지 동료를 돌아보며 천천히 걷던 소년은 어느 순간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야?”
얼어붙은 소년을 보며, 동료는 검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석양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유토.”
소년은 자신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공포가 그를 덮친 탓이다. 소년은 가던 길을 돌아와 다시 동료에게로 향했다. 극도의 불안 탓일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상이 이지러져 위태롭게 흔들렸다.
“죽지 마.”
소년은 동료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잡은 손을 통해 그의 체온이 느껴진다는 사실 하나에 소년은 겨우 안심했다. 드문드문 상처가 새겨진 단단한 손은 따뜻했다. 그는 살아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죽지 마, 유토.”
그 전까진 단 한 번도 죽음을 말한 적 없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소년은 갑자기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지고 생명이 사그라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상실에 익숙해진 사람인데, 평화로운 이 세계에서 죽음이 그들을 덮칠 리도 없는데. 소년은 혼자서 최악의 결말을 가정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다.
큰 싸움을 앞두고 걱정이 된 모양이다. 동료는 그렇게 판단하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몇 번이고 소년을 달랬다. 나는 이 세계에서 절대 죽을 수 없다고. 너를 두고 죽는 일은 없다고. 그러니 네 일에 전념하면 된다고. 그 확신 어린 선언에 마침내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동료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소년은 떠나면서도 동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소년은 불안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소년은 동료에게 갑자기 저를 덮친 불안의 근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독하게 따라붙는 저주와 관련된 것이기에. 만일 이야기를 꺼낸다면 피하고픈 저주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자신을 놓아준 적 없는 불행이 또다시 슬금슬금 저를 휘감고 있다고. 손을 흔드는 동료를 보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소년은 자신을 감싼 풍경이 어딘가 잘못되어있다는 걸 알았다. 시야에 잡힌 동료의 모습이 어느 순간 무채색으로 비쳤던 것이다. 눈을 감았다 떠도 같은 색이었다. 석양이 내리깔린 세상은 전부 그 빛으로 곱게 물드는데, 하나 남은 동료만이 음울한 무채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그 순간 소년의 눈앞에 지금껏 경험한 죽음이 차례로 스쳐지나갔다.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죽었다. 정을 붙인 것은 전부 죽음의 손길에 검게 말라붙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던가. 그에 질려 정을 쏟지 않게 되자 모든 것을 잃었다.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었던 가족도, 언제까지고 늠름하게 지켜줄 것 같던 어른들도 모두가 허망하게 흩어지지 않았던가. 그조차 만족하지 못해서, 죽음은 또다시 들이닥치려는 것일까.
이번만큼은 빗겨가야 했다. 죽음이 자비를 베풀어야 했다. 예외 없이 들이닥치던 법칙이 깨져야만 했다. 동료를 홀로 두고 가면서 소년은 최악의 결말만이 닥치지 않기를 몇 번이고 기원했다. 자신에게 다른 어떤 저주가 닥쳐도 좋으니, 제발 이번만큼은 예외이게 해달라고. 그를 앗아가지 말라고.
그러나 죽음은 소년을 놓아주지 않았다. 불행은 예외 없이 닥쳐 마지막 남은 이마저 빼앗아갔다. 그때야말로 소년은 자신을 저주했다. 그에게는 행복한 미래가 펼쳐졌어야 했는데, 그게 합당한데 제 곁에 있는 바람에 일찍 지고 말았다고. 내가 그를 말려버렸다고. 자책의 끝은 자신이 타인의 삶을 양분삼아 살아간다는 생각이었다. 죽음을 드리우고서 주변을 뿌리까지 말려버리며 탐욕스레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었다.
절망과 자기혐오와 스스로를 향한 저주를 안고도 소년이 겨우 마음을 추스른 것은 그럼에도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런 괴물이라면, 제가 삼킨 만큼 갚아야 했다. 살아남아서, 타인을 갉아먹은 만큼 세상을 채운 절망을 걷어내려 싸워야 했다. 이것은 속죄일까. 상실을 삼키며 싸우던 소년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목적조차 불분명해진 투쟁이었다.
“이제 결전만이 남았다.”
투쟁의 막바지였다. 소년의 협력자는, 그가 속한 정예병을 이끄는 사내는 화면 가득 적지의 모습을 띄우며 말했다. 적의 공격에 고향을 잃은 자로서 마땅히 기뻐할 일이었으나 소년은 침략자의 본거지를 확인하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상실과 파괴와 죽음 속에서 투쟁하며 감정마저 닳았던 탓이다.
“너는 감흥이 없나?”
“아. 몹시 기대돼.”
피해자로서의 심정을 물었으나, 돌아오는 건 무뚝뚝한 답변뿐이었다. 사내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한다.
“그 이전에, 하고픈 것은 전부 해두어라. 후회할 일을 남기지는 마.”
“그런 것 따위 없어. 작별인사를 할 사람조차 없고.”
“이 세계에 특별히 미련이 남은 건 없는지?”
“미련 같은 건 애초에 남기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런 건 불필요해.”
‘우리’라는 말을 내뱉고 소년은 지레 움찔했다. 이미 제 곁엔 아무도 없다. 자신을 휘감은 죽음의 저주가 남김없이 삼켜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지독한 싸움 속에서도 함께해온 동료까지 이 세계에서 잃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우리’를 말하는지.
“너는 싸우는 것에는 몰두하지만 그 외의 다른 것엔 지나치게 초연해. 알고는 있나?”
“그럴 수밖에 없어. 어차피 잃게 된다는 걸 아니까. 어쩌면 너희들도.”
“상실에 너무 익숙해진 건가.”
안경 너머로 비치는 사내의 보랏빛 눈은 냉정했다. 그는 언제나 타인을 해부하여 그 내부까지 파악해 진단을 내리려 들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으로 움직이는지 따위를. 지금도 그는 동정 없이 소년을 진단하고 있다.
“소중한 것은 모두 죽었다. 정을 붙인 것들은 남김없이 사라졌어. 나를 둘러싼 것은 전부 허망하게 흩어졌다. 그건 깰 수 없는 저주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애초에 마음을 두지 않는 편이 나아. 미련 따위 고통을 더 깊게 할 뿐이니.”
“호오. 저주라. 네가 그런 것도 믿는단 말이지? 놀랍군. 내가 생각한 쿠로사키 슌이라는 인물은 그런 것에 얽매일 인물이 아니었는데? 운명을 개척한다고 나선다면 모를까.”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만일 운명이라고 해도 거기에 순응할 생각은 없고. 다만 그것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언제나 들어맞았던 것뿐이야.”
“징크스는 징크스일 뿐이다. 법칙은 단 하나의 반례로도 뒤집히지.”
사내는 당당하게 말했다. 이 오만한 지휘관은 소년을 괴롭혀온 저주조차 한낱 징크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고 전부 살아남아. 너의 징크스는 그걸로 깨지는 거야.”
사내는 지금까지 스스로 일궈낸 결과에, 막바지에 다다른 투쟁에 다소 도취되어 있었다. 언제나 차갑게 가라앉던 그의 눈에 기묘한 열기가 내비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래도 그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어쨌든 그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전쟁을 실현시켰으니까. 전사들을 이끌고 적을 몰아붙여 마침내 결전까지 다다르게 했으니까. 게다가 그는 저렇게 호언할만한 실력도 갖추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소년은 믿고 싶어졌다. 그를, 그의 선언을, 그가 약속한 승리를.
어쩌면 정말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이겨서, 침략자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고 무너진 세상을 복구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가득한 절망을 걷어내고, 자신이 불러온 불행에 대해서도 속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언제나 자신을 휘감는 저주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소년 역시 거듭된 승리 속에서 방심했던 것이다. 삶을 지배해온 불행이 그렇게 간단히 걷힐 리가 없는데. 지독하게 따라붙던 저주를 겨우 그 정도로 떨쳐낼 수 있을 리 없는데. 그것을 확실히 체감한 것은 결전에서였다. 힘겹게 전투를 이어가던 때 어디선가 불길한 냄새가 났다. 냄새를 쫓으면 저 멀리, 쓰러진 자의 형체가 보인다. 함께 싸우던 전사였다. 시선을 조금만 멀리 두면 또 쓰러진 이가 보인다. 적진에 파고든 전사들은 차례로 쓰러졌다. 그들을 여기까지 이끈 지휘관도 끝까지 버티지는 못했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익숙한 풍경이었다. 모두가 무채색에 잠겨 쓰러지고, 소년만이 남은 음울한 광경. 어쩌면 결전에 뛰어들기 전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적의 기지에 침투할 때 이미 소년의 눈은 무채색만을 담았으니까. 그 불길한 징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다른 결말이 있기를 기대했다. 한동안의 승리에 취해, 같잖은 오만으로.
이번에는 저주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소년은 무릎을 꿇었다. 결국 자신은 괴물이었다. 죽음을 불러와 타인을 삼키는 괴물. 이제 그 대상은 같은 세계의 사람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전부가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그제야 소년은 확실히 받아들인다. 집요하게 자신을 뒤쫓던 죽음의 존재를, 그 강대한 힘을. 이제 그 절대적인 불행에 무의미한 발악을 거듭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의 희생을 지켜볼 용기도 없었다. 차라리 소년은 제 무력함을 인정하고 죽음 앞에 굴복하기로 했다.
그 순간 서늘하고 부드러운 것이 소년을 감쌌다. 그것은 죽음의 숨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