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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슌] 흉

현소야 2020. 11. 30. 23:53

 

청년은 핏자국을 밟고 서 있었다. 땅을 적신 피는 그가 흘린 것. 전투에 나서 적을 쓰러트리는 덴 성공했으나, 적이 부리던 몬스터에 부상을 입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청년의 등을 할퀸 것은 청년이 막 승기를 잡은 시점이었다. 정통으로 날아든 공격은 꽤 묵직해, 옷이 찢긴 틈새로 상처가 선명했다. 흘러내린 피는 외투를 적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바닥에까지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도 청년은 물러서는 일도,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일도 없었다. 청년의 금빛 눈은 도리어 공격당하기 전보다 매섭게 상대를 노려보았다.

청년이 지휘하듯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의 무기인 기계 새가 바로 적을 노렸다. 적을 섬멸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무기였다. 그에 포착된 이상, 적이 맞이하는 결말은 하나. 상대는 물론 그가 내세운 몬스터까지 쓸어버리는 것으로 청년의 전투는 끝났다. 무기를 거둔 청년은 맹금을 닮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 다른 위협이 없는지 살피는 것이 분명했다.

쿠로사키, 부상은?”

그때, 근처에서 청년처럼 적을 쓰러트린 소녀가 청년에게 달려와 물었다. 피는 멎었다지만 통증은 남았을 텐데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보다, 숨어든 놈이 있을지도 몰라. 같이 살필까, 세레나.”

언뜻 제안의 형태를 띠고 있긴 하나 소녀의 의사가 어떻든 이미 결론은 나 있는 듯한 말이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청년은 적의 흔적에 민감하다. 적을 쓰러트려 전사로서의 임무를 마치고도 청년의 시선은 계속 전장에 머무르고 있다. 뛰어난 전사인 청년은 침략당한 나라의 생존자란 배경 때문인지, 적과 관련된 것은 뿌리조차 남겨둬선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청년은 그곳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모든 위험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관제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사내는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청년과 소녀를 포함한 정예병의 지휘관으로서, 그는 자신의 전사를 제대로 관리할 의무가 있었다. 부상을 살피고 치료하는 것은 그로선 포기할 수 없는 책임이다. 사내는 통신으로 청년에게 지시했다.

[쿠로사키는 그대로 복귀해, 치료실로 가도록.]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역시, 바로 듣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청년은 언제나 자신을 병기처럼 취급한다. 전장에서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청년에겐 병기의 시각에서 접근하면 된다. 사내는 고집을 부리는 청년에게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부상을 치료하지 않으면 다음번엔 내보내지 않을 거다. 그런 걸 바라진 않겠지, 쿠로사키. 청년을 병기로서 대하는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청년은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치료실 쪽으로 향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몸을 살피지 않은 청년이 걱정되었을까, 함께 복귀 지시를 받은 소녀도 청년에게 따라붙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날 사내는 청년을 더 만나지 못했다. 전투에 대해 보고하러 온 것은 소녀뿐이었으므로. 소녀에게 청년의 부상이 어떠한지 묻자 큰 문제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내가 확인하려던 것은 그 정도까지였으나, 소녀는 기대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소녀가 치료실에 들어섰을 때 마침 청년이 웃옷을 벗고 상반신에 붕대를 감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평소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꽁꽁 싸매고 다니던 청년이 몸을 내놓은 것을 본 건 소녀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내가 온 걸 확인한 쿠로사키가 날 불렀어. 자기 등을 좀 봐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도와줬나?”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상은? 가볍게 묻자 덤덤한 답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상처가 많았다.”

레지스탕스로 살아왔기 때문이겠지.”

사내의 전사가 되기 전까지, 청년은 고향에서 저항군으로서 싸웠다. 평화 속에서 살아가던 소년이 전사가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지 사내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생존의 대가가 상처 몇 개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발 딛는 모든 곳을 전장으로 삼는 청년은, 아마 내면도 지독하게 황폐해져 있으리라. 사내가 건조한 감상을 쌓을 때, 소녀는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자신이 관찰한 것을 털어놓는다.

전장에서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한 모양이야. 대부분은 흉터가 남았지. 흉하게 찢긴 자리나, 만지면 울퉁불퉁할 것 같은 자국이 군데군데 있었어. 그런데…….”

그런데?”

딱 하나, 너무 깨끗한 상처가 있어서.”

바로 여기. 소녀는 왼손을 자신의 등에 대고 견갑골 부근을 짚었다.

쿠로사키가 살펴달라고 한 곳이기도 해. 자기 날개뼈의 상처 자국을 보고 뭔가 이상한 점이 없냐고 물었다.”

확인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

그래. 그렇게 답해도 안 믿기는지 몇 번 더 물었어. 계속 문제없다고 답하니 그제야 믿었고. 그쯤 되니 궁금해졌지.”

그 상처가 무엇이었는지. 덧붙여진 말에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도 궁금증이 인다. 문제의 상처는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몸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청년이, 타인에게 그렇게 무방비하게 몸을 보이면서 확인하려 들었던 것은. 그래서, 답은? 속에서부터 뭉글뭉글 솟아나는 호기심으로, 사내는 물었다.

이건 어쩌다 생긴 상처인지, 어떻게 이렇게 깨끗한 건지 물었더니 잘라낸 곳이거든.’이라고 답하더군.”

잘라내다니, 무엇을?”

물어도 답을 안 해. ‘글쎄, 남에게 보일 것은 아니었겠지.’라고 얼버무리기만 하고.”

숨기고 싶었던 부분인가.”

알 수 없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짚이는 게 없어서 너한테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기도 한데. 거기서 사내는 소녀가 청년의 상처에 대해 제법 길게 털어놓은 이유를 알아차리고 미소를 머금었다.

나라면 답을 알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쿠로사키는 네가 자기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불평했으니까.”

정말로 그만큼 알았으면 좋았을 거다. 쿠로사키는 경계가 너무 심해서 자기 이야기를 도통 하지 않거든.”

누구에게나 그렇겠지. 라고 덧붙였으나, 사내는 청년이 자신에게 유독 높은 벽을 쌓았음을 안다. 소녀를 포함한 정예병 동료 일곱 명과, 지휘관인 사내. 같은 목적으로 얽힌 여덟 명 중에서도 사내에게 특히 냉랭한 청년이었다. 여덟 명 중 청년이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대하는 사람이란, 사내의 어린 동생. 청년의 누이를 닮은 소녀. 청년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어 그럭저럭 신뢰를 쌓은 소년 정도. 지휘관이란 역할을 제외하면 사내는 그의 삶에 들어갈 틈이 없다.

그토록 촘촘한 경계를 단순한 불신으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청년은 사내의 뿌리를 혐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침략자가 바로 사내의 아비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청년이 마음을 연 소녀에게까지 털어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라면, 사내에겐 웬만해선 비밀로 남겨두려 할 것이다.

그래도 확인해둘 필요는 있겠군.”

그럼에도 사내는 소녀 앞에서, 얼마든 청년의 내면을 파헤칠 수 있는 듯 군다. ‘전사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위치를 가장하는 것인 동시에, 정말로 청년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말이기도 하다.

무엇을?”

잘라냈다는 상처. 그걸 의식하는 이유가 있을 거야. 심리적인 이유건 신체적인 이유건.”

쿠로사키가 이야기할지 의문인데.”

레지스탕스 시절에는 벼랑 끝에 몰려있으니 뭐든 덮어둬야 했겠지. 랜서즈인 지금은 달라. 스스로를 괴롭히는 문제가 있다면 수정해야 하고, 방치한 상처가 있다면 치료해야 해.”

전사로서최상의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해서라고 하면 쿠로사키도 이해할지도. 따라붙은 말에, 소녀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세레나. 그 상처가 날개뼈 쪽에 있었다고?”

확인하려 묻자 소녀가 즉답했다.

맞아. 그쪽에서 잘라낼 것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어.”

사람한테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심하게 덧붙인 말에 사내도 여러 가능성을 셈해보았지만, 상처 부위를 직접 보지 않은 이상 상상에도 한계가 있었다. 질환의 흔적? 어떠한 이유로 부착했던 기계 장치? 그런 것이라면 잘라낸다는 말보다 제거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마땅히 짚이는 것이 없어 사내는 결국 적당한 말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옷으로 가릴 수 있을 만한 것이었겠지. 그게 아니었다면 전장에선 방해가 되었을 테니까. 지금으로서 추측할 수 있는 건 그것뿐.”

답은 쿠로사키에게서 확인해야겠어. 무엇보다 상처를 내 눈으로 보면 좋겠는데. 타자를 관찰하고 정보를 틀어쥐고 싶어 하는 욕구를 사내는 숨기지 않는다. 청년처럼 비협조적인 사람이라도 예외는 없다. ‘그의전사이기에 사내는 청년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제법 의욕적으로 나서는 사내에게 소녀는 물었다.

몸을 보이게 할 방법이 있나?”

당연한 의문이었다. 청년은 단순히 타인을 경계하는 것만이 아니라, 몸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사람이었으니. 스스로를 병기로 취급하는 만큼 상처를 보이는 것을 싫어하리란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사내에게는 한 가지, 핑계거리가 있었다. 청년의 몸을 싸매는 코트를 풀고, 그의 몸을 확인하게 할 수 있을 것.

쿠로사키가 줄곧 피해온 것이 하나 있지.”

신체검사. 그럴듯한 핑계를 꺼내고서 사내는 만족스레 웃었다.

 

*

 

청년은 정예병 결성 전부터 사내의 품에 들어온 전사였다. 청년의 뛰어난 전투력과 실전 경험, 침략자에 맞선다는 공통된 목적. 거기에, 아비의 죄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내의 책무감까지. 사내가 청년을 거둬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사내에게 접근하겠답시고 사내의 사람들을 습격하기까지 한 청년을 주변에선 경계했으나, 사내는 청년을 제법 믿었다. 이국에서 온 청년에게 정예병 결성 계획을 알리고, 전사 선발을 맡기기까지 한 것은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언제나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의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제안은 전투와 관계된 것을 제외하면 거의 거절했고 이야기의 초점이 자신에게 맞춰지면 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너를 전사로서 믿고 있다, 쿠로사키. 너도 나를 지휘관으로 믿으면 돼. 사내가 그렇게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청년은 낡은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일 뿐이었다. 지휘관이라면 더더욱 나를 전사 이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없을 텐데.

그동안 검진을 거부해온 것도 그러한 불신의 연장선이었으리라고, 사내는 생각한다. 전장에서 버텨온 청년의 몸을 걱정해 지금까지 몇 번이나 검진을 받으라 지시했으나 청년은 한 번도 따르지 않았다.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부상? 없어.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질환도 마찬가지. 그러니 검진은 필요 없어. 코트까지 꼭꼭 여민 채 청년은 자꾸만 선을 그었다.

[타인이 너를 들여다보는 것이 두렵나?]

어느 날 사내는 슬그머니 도발하기도 했다. 청년이 그에 반박하려 들면 검진을 받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불필요한 부분까지 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렇게 말할 때조차 청년은 코트 차림이었다. 계절에 맞지 않은 옷차림은 몸을 숨겨야 한다는 강박의 결과로 느껴지기도 했다. 저항군의 표식이라는 붉은 스카프까지 목에 둘러, 살갗이 보이는 부분이라곤 얼굴과 손 정도.

[너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해도?]

[네가 나에게 줘야 할 도움은 나를 무장시키고 제대로 지휘하는 것뿐이다. 어중간한 관심이 아니라.]

[바로 그 점에서, 검진이 필요해. 아카데미아에 가기 전에 한 번쯤은 받게 할 생각이다.]

사내가 집요하게 검진을 요구하자 청년은 더 받아칠 가치도 없다는 듯 자리를 뜨는 것을 택했다. 그 후로는 정예병을 결성하고 임무를 알려주는 것이 바빠 청년에게 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사내였다. 물론 청년만큼이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고집스러운 사내였으므로, 검진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다음 목적지로 갈 준비는 되었나, 쿠로사키?”

사내가 청년을 불러들여 물은 것은 청년의 상처에 대해 들은 지 닷새가 된 시점이었다. 출격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청년은 즉답했다.

난 준비되지 않은 적 없었어.”

하나 놓친 것이 있을 텐데.”

덱은 점검을 마쳤고, 그쪽이 내준 정보로 적에 대해서도 미리 파악했다. 무얼 더 원하는지 모르겠는데.”

너를 제외한 랜서즈 멤버, 7명은 내게 검진 결과를 제출했어.”

청년이 만지작거리던 카드가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사내를 올려다보는 눈에 불쾌가 깃든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내가 그 다음에 꺼낼 말을 이미 짐작한 것이리라.

나는 안 받을 거라고 했지.”

미리 선을 긋는 청년에게 사내도 딱딱하게 답했다.

랜서즈 중 유일하게 부상까지 입은 사람이, 끝까지 자기 몸을 점검하지 않고 갈 생각이라고?”

네 전사에 그렇게 확신이 없나?”

쿠로사키 슌을 사용해달라고 이야기한 건 너다. 난 내 무기가 제대로 기능할지 확인해야 해.”

내가 요구하는 건 간단한 신체검사에 불과해. 그걸 피한다는 건 스스로 몸에 자신이 없다는 뜻일 거다. 무어라 반박하려는 청년에게 틈을 주지 않고, 사내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선택권을 주지. 쿠로사키. 첫째, LC 산하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것. 둘째, 의사에게 다시 등에 입은 부상을 확인받고 올 것. 둘 중 하나를 택하면 돼.”

꼭 네 회사 병원이어야 하나?”

“LC 산하 병원은 의료진도 시설도 흠 잡을 데가 없어. 내 회사, 레오 코퍼레이션과 연결되어 있으니 이방인인 네가 번거로운 절차 없이 검진을 받을 수 있고.”

물론 청년의 검진에 관여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두 개의 선택지를 주기는 했으나, 청년이 어느 쪽을 택하건 사내는 목적을 달성할 자신이 있었다. 전자를 택한다면 청년의 부상까지 낱낱이 살피도록 해 보고받으면 된다. 후자를 택하면 더욱 좋다. 등에 남은 상처를 파헤칠 명분이 충분하다. 어쩌면 진료 중 상처의 배경까지 듣게 될지도 모른다 사내가 답을 기다리는 동안 청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신경질적인 행동은 의외로 오래가지 않았다. 청년은 예상보다 빨리 입을 뗐다.

좋아. 후자로 하지.”

불만이 선명히 그려진 얼굴으로나마 청년은 사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순순히 따라줄 생각은 없었는지 단서를 붙인다.

네 지시대로 하기로 했으니 내 편의는 조금 봐줘야겠어.”

어떤 식으로?”

사내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스카프를 푸는 것이었다. 저항군의 표식이란 이유로 언제나 목을 감싸던 것이 너무도 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청년의 손가락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코트 단추를 풀었다. 쿠로사키, 무슨 생각이지? 짚이는 것이 없는 사내가 물어도 청년은 코트를 벗어던질 뿐이었다. 청년이 와이셔츠 단추까지 풀기 시작한 때서야 사내는 그가 웃옷을 다 벗어던지리란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쿠로사키. 급히 청년을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와이셔츠가 바닥에 떨어지고, 그 아래 입었던 것도 주변의 테이블에 놓였다.

의사에게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청년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의 상반신에 걸쳐진 것이라곤 상처를 싸맨 붕대뿐. 사내가 청년에게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던 것처럼, 청년도 사내가 상황을 판단할 틈 없이 사내에게 바짝 다가왔다. 숨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졌을 때 청년은 뒤돌아 섰다.

네가 직접 확인하라고.”

거기서 사내는 확실하게 이해했다. 청년은 그에게 등을 보이려 한 것이라고. 의사 대신 그에게 부상 확인이란 일을 맡기는 셈이다. , 무슨 이유로, 머리를 치는 의문을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으리라. 소녀에게 들었던 수상한상처, 청년이 다른 사람에겐 내보이지 않을 부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호기심을 해결할 기회가 너무 쉽게 찾아와서 사내는 되레 찜찜할 정도였다.

안 보고 뭐 해.”

얼마간 멍하니 서 있던 사내는, 청년의 재촉에 붕대를 풀었다. 닷새 전에 새겨진 상처가 얌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관제실에서 볼 땐 몬스터가 제법 깊게 할퀸 것 같았는데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는 가벼운 상처였다. 특별한 치료 없이 잘 관리하기만 해도 전투에 방해되는 일은 없을 듯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청년의 물음에 사내의 입술이 열렸다.

확실히…….”

일단 운을 떼긴 했으나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사내에게, 청년은 이번에야말로 생각지 못한 말로 받아쳤다.

별로 관심 없겠지. 네가 보고 싶었던 건 그쪽이 아니었을 테니까.”

의미를 모르겠어, 쿠로사키.”

너는 제 눈으로본 것에는 그렇게 관심은 없어. 이미 네 판단이 선 것이니 크게 흥미가 없는 거지. 바로 며칠 전 관제실에서 직접 목격한 부상보다 내가 스탠더드에 오기 전에 입은 상처에 더 관심을 둘 수밖에.”

그걸 알면서도, 너는.”

나에게 일부러 보여줬던 건가? 흘러나오려는 말을 사내는 삼킨다. 청년이 그의 속내를 눈치챈 이상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상대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은 사내인데, 정말로 그 머릿속을 해부한 것은 청년이었다. 속에서 당혹스러움과 패배감이 뒤엉켰다. 입술을 깨문 채 말을 고르는 사내에게, 청년은 여유롭게 말을 건넨다. 그러니까 네 눈으로 직접 보고 머리에 담아두라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기서 나가면 없었던 일로 쳐줄게. 자못 관대한 말에 사내는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은 청년의 등으로, 정확히는 청년의 과거를 상징하는 흉터로 향했다. 유물이라도 살피는 듯 조심스레 쓸자, 기묘한 감각이 손을 타고 전해진다. 덧난 곳의 울퉁불퉁함, 제대로 봉합되지 않았던 상처의 패인 자국. 싸움의 증거이자 생존의 대가였던 상처를 사내는 하나하나 훑어내렸다. 비극의 흔적에 감상을 흘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렇게 차례로 쓸어보다, 하나가 남았다. 사내가 내내 궁금해했던 날개뼈 쪽의 상처. 직접 보니 소녀의 말대로 이질적인 상처였다. 지나치게 말끔한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분명, 타인의 손이 닿은 흔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안고 온 부상이 아니라, ‘시술을 받은자국이었다.

이건 어쩌다 난 거지?”

그러니 사내는 물을 수밖에 없다. 수상쩍은 상처의 정체를. 청년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야 했던 이유를.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청년이 지금껏 말해준 적 없는 신체적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 자리, 부상을 입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바로 답을 주지 않는 청년을 은근히 압박하자 짤막한 답이 돌아왔다.

잘라낸 자리야.”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 만족할 수 없다. 사내는 집요하게 묻기로 했다.

세레나에게 몇 번이나 확인해달라고 했다던데, 불안해했던 이유는?”

역시 이쪽에 관심이 있었군. 환상통에 시달렸을 뿐이다만.”

무엇을 잘라냈기에?”

거기서 청년은 몸을 홱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 줄 알았는데, 청년의 금빛 눈에 깃든 것은 불쾌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사내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씁쓸함.

날개.”

메마른 목소리로 청년은 고백한다. 잘라내야만 했던 것을, 이제는 제 몸에 남아있지 않은 것을. 날개라고 해서 보통의 날개를 생각해선 안 돼. 인간에겐 그런 날개가 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쓸모없는 조직이 생겨난 거라 생각해야지. 그게 어쩌다 날개를 닮았을 뿐이고, 보통의 날개처럼 자라기까지 했을 뿐이야. 너 같은 사람이 절대 믿지 않을 이야기군. 청년이 띄엄띄엄 말을 흘릴 때, 사내는 문제의 상처가 난 자리를 눈앞에 그려본다. 저기에 청년의 <날개>가 뿌리내렸을까. 그의 날개는 어디까지 덮었을까. 사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날개를 상상한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고 마땅히 붙일 설명도 없어서, 적당히 옷으로 가렸지. 그런데 점점 자라났단 말이야. 감당하기 힘들어질 정도로. 그래서. 청년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을 잇는다. 내 주변에선 딱 한 명, 날개를 본 사람이 있었거든. 그 쓸모없는 조직에 날개란 이름을 붙여준 것도 그 애였어. 누구일 것 같아? 청년의 물음에 사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년의 고향 사람 중 사내가 아는 것은 두 명뿐이다. 침략군에게 납치된, 그의 누이. 그리고 유일무이한 친우라고 부르는 소년. 네 동생? 확신 없는 목소리에 청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플 텐데.’하고 이야기하더군. 하지만 거절하진 않았지. 루리는 손재주가 좋았지만 날개를 깔끔하게 잘라내지 못했어. 아마 마음이 약해서일 거야. 정말로, 내가 아플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잘 자르지 못했다기엔 이 자리는 너무도 깔끔한데.”

그야, 그건 루리 솜씨가 아니니까.”

루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납치되었다. 날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물론 잘라줄 사람마저도 없어졌다는 거야. 청년은 잔해처럼 텁텁한 목소리로 비극을 읊었다.

그 후로도 날개가 말썽이었나.”

깨끗하게 잘라내지 못하니, 뿌리가 남은 모양이야. 괴상하게 자라나서 언젠가부턴 싸우는 데도 방해가 되었어. 남에게 날개를 보이지 않으려 하다 보니 등에 입은 부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것도 싫었지.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칼을 쥐여주었다. 루리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사람. 그 끔찍한 조직에 대해 깊게 묻지 않을 자.”

유토.”

조건에 들어맞는 것은 한 사람밖에 없다. 청년의 유일무이한 친우. 청년이 희망을 찾아 무작정 사내의 나라로 왔을 때, 청년을 따라와주기까지 한 소년. 과연 청년은 미지근한 웃음을 걸친다. 바로 맞혔다는 뜻임을, 사내는 안다.

유토는 손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잘라낸 자리는 루리 때보다 깔끔했어. 제법 과감하게 잘랐었거든. . 이제 됐어. 이제 방해되는 건 없어. 유토는 그렇게 말하고서, 날개를 아무렇게나 버렸다. 쓰레기처럼, 미련 없이.”

그렇게 날개에서 해방되었군.”

그럴 줄 알았는데 요즘 다시 그 자리가 욱신거리는 거야. 정확히 날개가 돋아날 때의 욱신거림이었어. 그 공허한 통증이 어디서 왔나 생각했을 때 유토와 루리의 얼굴이 떠오르더군. 이제 내 곁에 없는 사람들. 그 망할 조직을 잘라준 사람들 말이야.”

사내는 그제야 청년이 소녀에게 몇 번이고 상처에 대해 확인한 이유를 알아챈다. 환상통의 근원도 이해한다. 청년이 내내 숨겨왔던 상처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부위는 이제 사라진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된 것이다. ‘쓸모없는 조직이 몸에 붙어있을 때까지만 해도 누이와 친우는 청년과 함께했다. 그들이 그의 세상에서 희미해진 건 날개가 잘려나간 후였다.

……날개, 가 있던 자리를 스스로 확인할 자신은 없었어. 그래서 세레나에게 부탁한 거다. 세레나는 무심하게 답해줬고. 아무 문제도 없어, 쿠로사키. 아주 말끔해.”

아주, 말끔해. 청년은 눈을 내리깔며 느릿하게 되풀이했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 전투에 방해되는 것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는 것뿐. 그래서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 분명 더 감상이 있었을 텐데 청년은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고 만다. 사내는 청년이 조용히 옷을 챙기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때? 설명은 충분했나?”

그렇게 물었을 때 청년은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사내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으므로 이제 더 보일 폐허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사내는 청년이 와이셔츠 단추를 전부 채우고 코트를 걸칠 때서야 입을 뗐다.

충분해.”

내 심연을 보길 기대했을 텐데, 이 정도라서 미안하군.”

저항군의 표식을 집어 들며, 청년은 가볍게 빈정댄다. 과거의 흔적을 통해 그의 내면까지 들여다보려던 사내의 욕구를 진즉 눈치챈 모양이었다. 사내는 굳이 부정하는 대신 건조한 말을 흘렸다.

……날개는 다시 돋아나지 않을 거다.”

알고 있어.”

앞으로 환상통에 시달리는 일도 없어.”

어떻게 확신하지?”

너는 아카데미아를 무너뜨리고 동생을 구하기 위해 랜서즈가 되기로 했지. 나는 네게 승리를 약속했고. 내가 목표를 이룬다면 루리도, 유토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이미 잘라낸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난 너에게 예전 같은 날을 돌려줄 테니까. 자신만만한 선언에 청년은 사내를 응시했다. 폐허를 닮은 눈이, 황폐함에 익숙해진 저항군의 눈이 지휘관을 오래도록 담았다. 삼켜버릴 듯 진득한 시선은 사내를 시험하는 듯했으나, 사내는 끝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청년의 입술이 열렸고.

시시하긴.”

스카프를 목에 맨 청년은 사내를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지려는 청년에게 사내는 한 번 더 말을 꽂는다.

난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 없어.”

그래, 순진한 놈들을 믿어주는 게 내 나쁜 버릇이지.”

그럼, 어디 끝까지 힘써보라고. 그렇게 말하고서 청년은 이번에야말로 문을 열고 자리를 떴다. 코트로 싸맨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사내는 청년이 자신의 선언에 부정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절망에 짓눌리고 황폐해진 인간임에도 희망을 마냥 불신하지 않은 것이다. 사내의 말을 가볍게 넘겨버린 것인지, 사내를 선택한 이상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청년이 그의 선언을 받아들였다는 것.

전사는 지휘관을 믿어주기로 했다. 덮어둘 수 있을 과거를 보여주고서, 공허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약속까지 받아주었다. 이제는 사내가 약속을 지키는 일만이 남았다. 사내는 청년의 희망이 될 수 없어도 청년의 전쟁은 끝낼 수 있을 사람이었다. 청년의 세계엔 들어설 수 없더라도 청년의 세계를 지킬 힘을 줄 사람이기도 했다. 실패를 겪어본 적 없는 사람으로서, 사내는 승리를 자신한다. 언젠가 청년은 그의 전사가 되어준 대가로 일상을 돌려받게 되리라.

그러기 위해선 청년이 스스로를 뛰어난 전사로 만들어왔듯 사내도 최고의 지휘관이 되어야만 한다. 전사가 떠난 자리에서 사내는 스크린 가득 침략군의 자료를 띄운다. 전사를 움직여야 할 지휘관으로서 사내가 가장 믿는 무기가 그것이었다. 오랜 기간 긁어모은 정보는 사내를 무장시키고, 그의 전사들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으니까. 청년이 맞닥뜨릴 위험을 미리 살피며 사내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반드시 승리할 전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