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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슌ts] 존재의 증거

현소야 2020. 10. 16. 17:01

 

기계장치로 무장한 새가 하늘을 누빈다. 한참이나 빙빙 돌다가 먹이라도 찾은 듯 급강하하는 것이 꼭 실제의 맹금 같다. 적을 섬멸하는 게 목적인 병기는 기묘하게도 자연의 생물을 흉내 내고 있었다. 본디 평화로운 때에 만들어진 것이어서인지, 아니면 사용자의 취향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사내는 기계 새가 지상으로 향할 때면 안도감에 휩싸이곤 했다. 곡예를 연상시키는 그 아슬아슬한 비행은 주인의 복귀를 뜻하는 신호. 이대로 착륙하기만 하면 사내는 자신의 전사를 맞을 수 있다. 기계 새의 사용자이자, 전장에서 버텨온 생존자를.

정예병을 결성하면서부터 사내는 지휘관이 되었지만, 그 전부터 그의 전사가 되어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평생 알지도 못할 이국에서 온 여자. 침략군이 밀려들며 살아온 곳이 폐허가 되고 사랑하던 것이 사라졌기에, 여자는 희망을 찾아 사내에게 왔다. 고향에서 저항군으로 싸울 때 그녀를 지켜주었던 기계 새만을 데리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아카데미아에 맞서겠다고 했나? 낡은 기계 같은 목소리로 여자는 사내에게 제안했다. 나를 써서, 아카데미아를 무너뜨려.

[전사로 받아들여달라는 건가, 아니면 무기로 사용해달라는 뜻?]

여자의 고향을 덮친 침략군은, 언젠가 사내가 쓰러트려야 할 적. 세계를 전부 삼키려는 침략자의 야욕을 막으려는 사내였으나 여자의 제안은 너무도 단정적이라 되레 그가 조심스러워질 지경이었다. 같은 적을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이국의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또 자신을 사용하도록내줄 수 있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침략군의 수장이 바로 그의 아비인 것을 알면서도 함께할 수 있는가. 여러 의문을 담아 사내는 물었고, 여자는 망설임 없이 받아쳤다.

[같은 이야기 아닌가?]

나는 전장에서 살아남았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덧붙인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군대에 맞서기로 한 이상 사내에겐 전사가, 그것도 이미 여러 전투를 거쳐온 자가 필요했다. 여자가 저에게 품을 감정이나 저에게 내보이지 않을 속내 따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전쟁에서 전사란 무기로 소모되곤 한다는 것도 사내는 모르지 않았다.

전장이란 지옥에서 싸워살아남는 것은 운만으로는 어렵다. 여자가 어떻게 전장에서 버텼던 것인지, 사내는 그녀를 전투에 내보내자마자 알게 되었다. 그녀는 병기인 기계 새와 한몸처럼 움직이며 적을 삼킨다. 기계 새를 조종하며 하늘을 누비는 모습을 보면 그녀의 전장이란 지상의 폐허가 아닌 먼 하늘인 것만 같았다. 지상의 적을 따돌릴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다수의 적을 유인했다 일시에 섬멸하는 것이 그녀의 특기. 승기를 잡은 여자가 내리꽂는 폭격은 신벌처럼 무자비했다.

폐허에서 온 여자는 지나간 자리를 폐허로 만드는 법도 익힌 듯했다. 그녀가 나선 전투는 대개 모든 것을 짓밟고 끝나곤 했다. 그녀의 무시무시한 공격 패턴과 적을 반드시 쓰러트리는 냉정함은 주변의 두려움을 샀다. 그렇게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싸우면 적은 물론 자신까지 삼키게 되리란 말도 따라붙었다. 사내는 그녀를 둘러싼 여러 말에 드러나게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너무 쉽게, 너무 많은 것을 내던진다. 모든 것을 앗아간 적을 쓰러트리고 현재의 싸움을 끝내려, 미래마저 가불할 듯 군다.

눈을 떼면, 꺾일 것만 같다. 자신의 삶을 다 태워 적을 삼키고선 거짓말처럼 세상에서 사라질 것 같다. 그렇게 위태로운 여자를 사내가 눈으로 쫓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처럼 여자가 복귀할 때쯤이면 미리 나서 기다리는 것도, 전사를 챙기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무사함을 제 눈으로 먼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다. 기계 새가 착륙하는 것을 지켜보고서야 사내는 마음을 놓는다.

그의 전사는, 이번에도 그에게 돌아왔다.

수고했다. 쿠로사키.”

오랜만에 지상에 닿은 여자에게, 몇 발짝 밖에 서 있던 사내가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친히 맞아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전투 결과는 이미 츠키카게를 통해 보고받았을 거고.”

지휘관으로서 전사를 살피는 건 흠이 아니지.”

그쪽의 역할은 사령관이라기보다 리더에 가깝지만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사내는 불손함을 지적하는 대신 빈 웃음을 걸친다. 지휘관이라는 이름은 전사를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끌어온 이름일 뿐. 명확히 따지자면 그는 여자의 상관이 아니라 사용자였다. 평소엔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사항을 여자가 굳이 상기시키는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저를 들여다보려는 사내에게 선을 긋는 것이다. 우리는 전투로만 얽힌 사이라고. 일반적인 관계에서의 친밀감도 신뢰도, 우리에겐 적용되지 않을 거라고.

좋아. 그럼 내 전사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할까.”

한 발 물러서는 체 하자 여자는 그제야 제대로 반응한다.

부상은 없어. 난 기본적으로 이 녀석, RR에 탑승하니 아무래도 몸은 보호받게 되지. 그만큼 놈에겐 타격이 가지만.”

기계 새를 쓰다듬는 손길은 애정이 가득하다. 차가운 기계 몸에 무시무시한 무기로 무장한 병기라 해도 여자에겐 그것이야말로 소중한 전우이리라. 고향에서부터 따라와준, 그녀의 유일한 동지. 함께 다녔다던 친우는 먼 이국에서 쓰러졌다. 하나뿐인 가족은 적에 납치되어 생사조차 불분명하다. 그녀에겐 남은 건 이제, 자신의 몸과 그 몸을 의지할 병기뿐.

정비가 필요한가? 전에도 말했듯이 기술자는 준비되어 있다.”

그러니 사내가 슬그머니 꺼낸 말에 여자가 바로 경계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딱딱한 목소리로 그녀는 사내의 관심을 막아선다.

그쪽에게 넘겨주지 않을 거라니까. 엑시즈에 대한 지식이 없는 여기서 잘못 손대면 큰일이니까.”

아쉽군. 분석할 기회가 있었으면 했는데.”

“RR에 그렇게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뭐야?”

여자의 물음에 사내의 머릿속엔 소용돌이가 인다. 그는 여자의 동지를 알고 싶었고, 그 성능을 확인하고 싶었고 여기까지는 평범한 설명이었으나 사내에겐 더 중요한 이유가 남아있다. 그녀 앞에선 꺼내지 못할 것, 혹은 그녀가 영영 이해하지 못할 욕망.

미지의 영역을 파헤치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라 생각해.”

물론 사내가 돌려준 것은 적당한 답변이었다.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 선의, 빤한 이야기. 그녀가 가장 신뢰하는 무기를 통해 그녀를 파헤치고 싶다느니, 언제든 사라질 것 같은 그녀를 시야에 묶어두려는 핑계라느니. 지휘관과 전사의 관계에 어울리지 않는 속마음까지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었으므로.

지식욕인가.”

그쪽은 지휘관보단 연구자의 길을 걷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깔깔대는 여자에게서 진짜 목적에 대한 의심은 비치지 않는다.

불쾌한가?”

아니. 재미있어서. 패턴은 우리와 비슷한데, 바탕은 전혀 다르단 말이지.”

우리?”

레지스탕스 얘기야. 아무래도 우리는, 뭐든 틀어쥐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어서.”

다만 그건. 목소리에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다. 그녀가 우리란 이름으로 묶은 건, 전장에서 함께 싸웠던 저항군. 이젠 생존자를 찾기 어려운 동료였다. 따라붙는 감정이 무거울 수밖에. 사내는 여자를 내리누르는 감정을 읽지 못한 체 묻는다.

바탕이 다르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지?”

당신이 미지를 탐구하려 자료를 모은다면, 레지스탕스는 버리지 못해 모든 파편을 끌어안아. 지식욕이라기보다 집착에 가까운 태도지. 미련인지 탐욕인지 모르겠어.”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남은 것이 잔해뿐이니까.”

짤막한 답변에 쓸쓸함은 없다.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사답게, 과거를 정리한다.

나답지 않게 너무 많이 이야기했어. 그쪽의 술수에 걸려들 뻔했지 뭐야.”

술수라니. 나를 어지간히도 못 믿는 모양이야. 네 삶의 일부를 듣는다고 너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건 다행이네.”

불필요한 정보는 서로 남겨두지 않는 게 좋잖아. 그렇게 말한 여자는 사내를 앞질러 성큼성큼 기지로 걸었다. 사내는 그녀에게 따라붙는 대신,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오랜 전우를 눈에 담는다. 기계로 덮인 몸은 적습에 한 번도 부서진 적이 없다. 균열이 나지 않기에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틈을 허락하지 않는 모습이, 언제나 무장한 것이 주인을 닮았다. 괜한 감상에 젖어, 사내는 병기를 쓸어보았다. 깃털의 보드라운 감촉 대신 쇳덩이의 서늘함이 손에 오래 머물렀다.

 

*

 

여자는 사내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모든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여자와 함께한 지 수개월째, 사내는 그녀의 습관을 하나 발견했다. 전투를 마치고 복귀할 때 잡동사니를 챙겨오는 것이었다. 혹 숨겨진 가치가 있진 않을까 생각했던 사내였지만 이내 그 전리품이 사소하기 짝이 없는 물건임을 알게 되었다. 그마저도 일부는 부서져, 용도에 맞게 쓰지도 못할 것들이었다. 그렇게 별볼일없는 물건의 공통점은 하나. 그녀의 고향과 연결고리가 있다는 점.

여자의 수집품은, 말하자면 폐허의 잔해였다. 매일같이 사람이 쓸려나가는 지옥에서 말짱한 수집품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껏해야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물건, 사용가치가 없는 것만이 보일 것이다. 그게 아니면, 부서지고 짓밟힌 파편뿐. 언젠가 볼품없는 물건을 챙겨오는 이유를 물었을 때, 여자는 유물 수집이라는 감상적인 설명을 돌려준 적이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고향이 완전히 파괴되어 지도상에서도 사라지면, 그곳의 모든 것이 망국의 유물이 될 테니.

전리품의 정체를 알았을 땐 여자가 자꾸만 잡동사니를 실어오는 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잃은 것에 대한 향수란 드문 일도 아니기에 사내는 여자의 괴상한 습관을 적당히 모른 체 하기로 했다. 잔해를 긁어모으는 행동도, 그 습관에 깔린 씁쓸한 감정도. 읽지 못한 척 넘기는 것이다. 그러한 계획은 그녀가 그 수집품 일부를 사내에게 가져오면서 꼬였다. 언제부턴가, 기지에 복귀하여 정예병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여자는 슬그머니 사내를 찾아왔다. 언젠간 정말로 유물이 될지도 모를, 폐허의 잔해를 몇 개 끌어안고서.

다음은 사내에게 수집품을 늘어놓는 일이었다. 소개해주는 것이냐 물으니 당신을 위해 챙긴 거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일부러, 그것도 사내를 위해 구해왔다는 것이다. 평소 드러나게 선을 그으며 타인을 경계해온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다. 다만 사내는 그 낯선 친절이 싫지 않았다. 수집품의 본래 용도와 특징을 설명할 때, 그녀의 눈에 깃드는 열기도 좋았다. 유물을 끌어안을 때만 그녀는 제 나이로 보였다. 스물이 되지 않은, 아직 많은 것을 꿈꿀 수 있는 나이로.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늦은 밤이 되어 지휘관의 방에 온 여자는 사내의 책상에 자랑스레 물건을 내려놓는다. 뚜껑에 살짝 흠이 난 세공품, 무기의 파편, 그을린 서류 등. 일관성 없는 수집품을. 이 중 당신이 원하는 게 있지 않을까? 한가한 말에 사내는 웃음을 걸친다.

이렇게 챙겨주는 건 고맙지만, 네 취미생활에 나까지 끼워줄 필요는 없어. 가져와봤자 가치도 모를 텐데.”

당신은 이런 걸 좋아할 줄 알았더니.”

어떤 점에서?”

미지의 영역을 파헤치고 싶다고 했잖아.”

엑시즈를 연구할 수 있도록 자료를 가져오는 건데. 따라붙은 말에 사내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여자가 그에게 수집품을 넘겨주기 시작한 시점. 기억을 더듬으면, 사내가 그녀 앞에서 지식욕 이야기를 꺼낸 후부터였던 것 같다. 여자의 병기, 정확히는 그녀의 것에 대한 관심의 핑계로 둘러댔던 것인데 아무래도 여자는 진심으로 들은 모양이었다. 그에게 고향의 유물을 넘겨주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귀한 자료를 넘겨줄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알다시피 엑시즈는 폐허가 되어서. 하트랜드 주변이 아니면 무엇 하나 건지기도 어려워.”

그런데도 수고스럽게 모아온단 말이지.”

그쪽이 내 취미를 봐주는 대가라고 치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쿠로사키.”

사내는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잇는다.

네가 유물을 수집하는 건, 무엇을 기대해서지?”

기대?”

순수하게 유물 수집에 집중한다기엔 네 수집품은 고향의 것으로 한정되어 있다. 엑시즈의 흔적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겠지. 그리움을 달랜다거나, 그걸 모아다 나중에 고향의 문화를 복원하려 한다거나.”

정말, 그쪽은 연구자 같은 데가 있다니까. 모든 것에 이유를 찾으려 해.”

나에겐 말해주지 않을 생각인가?”

전쟁에 짓눌려 불신과 경계를 쌓았을 여자가 타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의무는 없다. 상대가 적의 아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때문에 사내의 물음엔 반쯤은 체념이 섞여있었으나, 여자는 고개를 내젓지도 회피하지도 않았다. 사실 이건. 운을 떼는 목소리가 어쩐지 침중하다.

엑시즈에서부터 이어져온 습관이야. 흔적을 긁어모으는 것.”

느릿하게 흘러나온 것은 간결한 답변이었다. 여자는 더 캐내는 것을 원치 않으리란 생각이 사내의 머리를 스쳤으나, 그녀의 속내를 알고 싶다는 마음을 이길 순 없었다. 사내는 그대로 수긍하는 대신 물음을 덧대기로 했다.

너의? 아니면 레지스탕스의?”

원래는 후자였지만 이젠 내 습관이기도 하지. 옮아버린 거라고 생각해.”

레지스탕스는 잔해를 끌어안기 때문에?”

잔해라. 정확한 표현이야.”

긁어모을 건 잔해밖에 없으니까. 무심하게 덧붙인 여자는 무기의 파편을 집어 들여다본다.

살아오던 바탕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니 언제나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그래서 남아있는 것은 죄다 끌어안는 거야.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것이어도 지나고 보면 그게 유물이고 증거가 될 테니까.”

어떤 증거?”

글쎄. ‘내가존재했다는 증거? 아니면 내가 아는 사람들이살아있었다는 증거? 보통 사람들은 새삼 그런 것을 찾으려 들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레지스탕스는.”

그런 것이라도 끌어안지 않으면 못 버티는 거겠지.”

불쑥 끼어들자 여자의 시선이 바로 사내에게로 향했다. 단정한 얼굴은 굳어져 있다. 어쩌면 사내의 해석이 참혹함을 모르는 이의 얄팍한 이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가 전쟁의 직접적 피해자가 아닌 제3자임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사내는 어쩐지 그녀가 이야기하는 씁쓸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증거를 찾는 건, 그녀의 동료들만이 아니다.

……그랬던 모양이야. 난 차마 묻지 못했지만.”

너는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군. 증거를 찾으려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 말로 사내는 자신의 심리도 숨길 수 있다. 여자의 흔적을 눈으로 쫓고, 그녀와의 연결고리를 수집하고 싶은 마음을. 그러니까 쿠로사키, 내 앞에서 편하게 이야기해도 좋아. 은근한 말에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동료들을 보고 흉내 낸 거라, 어떤 마음인지는 잘 몰라.”

그럼 이렇게 엑시즈의 흔적을 모으는 것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동료를 모방하다 습관이 들었을 뿐이라고?”

처음에는 레지스탕스 동료끼리 전쟁 전부터 지녔던 물건을 교환하는 식이었어. 서로의 흔적을 쥐자 생각했던 걸까. 교환한 사람이 생존하면 그 사람의 흔적과 함께 싸우는 거고, 만일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그거라도 유품으로 삼게 되니까.”

그런 습관이 지금의 것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사람이, 없잖아. 레지스탕스 스페이드 분대가 전멸하고, 내가 하트랜드를 떠나온 지금 이전처럼 하는 건 불가능해. 그런데도 습관은 남아서, 무어라도 챙겨야 할 것 같은 거지.”

그래서 여자는 동료의 흔적 대신, 동료를 삼킨 폐허를 끌어안게 되었으리라. 잔해를 수집하는 것은 폐허의 유물이 그것뿐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더 할 이유도 남지 않았는데, 그동안 해왔단 이유로 껍질만 흉내 내는 거 우습지. 물기 없는 목소리로 말한 여자는 쥐고 있던 것을 다시 사내 앞에 내려놓는다. 무기의 파편. 어쩌면 그녀에게 가장 처참할지도 모를, 전쟁을 상기시키는 유물.

그 정도로 무의미한 습관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또다시, 여자는 선을 긋는다. 사내가 들여다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겨우 내보인 내면을 다시 덮어버리는 것이다. 잡동사니가 싫으면 말해. 라고만 이야기하고 돌아서는 등이 사내는 너무도 위태롭게 느껴졌다. 급강하하는 기계 새처럼, 내일도 약속할 수 없는 그녀의 삶처럼.

이전처럼 흔적을 교환할 사람이 있다면, ‘무의미한 습관은 없앨 생각인가?”

다급하게 던진 말에 막 자리를 뜨려던 여자가 멈췄다. 외면하고 떠날 수도 있었으련만 여자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야 하는 이유라도?”

그러면 너도 이런 잔해로부터 해방될 테니까. 레지스탕스와 무게가 같을 순 없지만, 지금 네게는 함께 싸우는 동료가 있지. 랜서즈와, 리더인 나. 모두 정예병이니만큼 네 삶에서 쉽게 잘려나가진 않을 거다.”

교환해도, 유품이 되진 않을 거라고?”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료한 해석이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사내에게 여자는 천천히 다가왔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쪽이랑 바꿔볼까.”

나와?”

다른 놈한텐 귀찮게 다시 설명해야 할 테니까, 당신이 좋겠네.”

여자는 왼손목에 걸친 가죽팔찌를 풀어내더니 사내의 손을 끌어와 그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내가 내놓을 건 이거 하나밖에 없어.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선물로 받은 거야. 나중에 꼭 돌려받을 테니 잘 간직하고 있으라고.”

좋아.”

그쪽은 뭘 줄 생각인데? 여자의 물음에 사내는 잠깐 생각에 빠졌다. 여자를 붙잡기 위해 먼저 서로의 물건을 교환하잔 이야기를 꺼내긴 했으나 건네줄 것이 마땅찮은 건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던 사내는 하나, 무리 없이 줄 수 있는 것을 떠올려낸다. 생각을 마치자마자 그의 손은 자신의 귓불로 향한다. 아비에게 맞서기로 다짐한 때부터 해온 피어싱이 있다. 침략군을 쓰러트릴 정도로 강해지겠단 마음을 담았으니 여자에게 내밀기 부끄럽지 않다.

다만, 피어싱은 한 쌍이었다. 한쪽만 하고 다니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으므로, 사내는 여자에게 하나를 내놓는 한 남은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사내는 여자의 손에, 그가 유일하게 걸치던 액세서리를 내어준다. 한 쌍도 아닌 한 쪽을 굳이 내미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쪽만?”

그러니 네가 나중에 돌려줘야지.”

전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아달라는 마음을 사내는 그렇게 표현한다. 사내의 속내를 읽었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싱겁게 웃으며 피어싱을 받아주었다. 이래서야 나도 못 하겠는데. 덧붙이는 말에 쓸쓸함은 비치지 않는다.

어차피 주인이 바뀌는 건 아니니 사소한 것엔 신경 쓸 필요 없겠지.”

아카데미아 진입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던가? 그럼 당신이나 나나, 곧 돌려주게 되겠네.”

그래. 우리의 싸움은 곧 끝이 나. 적의 본거지를 치는 일만 남았으니. 아카데미아를 무너뜨리면 우리도 자유로워지는 거다. 전투로부터, 책임으로부터.”

그럼 레이라는 제대로 교육을 받게 되고, 나머지도 전부 원래 자리로 돌아가. 평범한 삶을 누리게 되는 거지. 사내가 희망적인 미래를 읊을 때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의 처참함을 잘 아는 만큼 낙관을 비웃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녀도 그러한 미래를 믿고 싶었는지.

물론 쿠로사키, 너도 네게 어울리는 미래를 만들게 될 거다.”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RR은 은퇴시킬 거야.”

적이 없는 곳에 병기를 둘 필요는 없지.”

“RR의 원래 목적은 비행이 전부였으니까, 무기 같은 건 전부 떼고 하늘을 실컷 날게 해 주려고.”

그렇게 말할 때 여자의 얼굴엔 아이 같은 천진함이 비친다. 진귀한 모습에, 사내의 시선은 진득하게 달라붙고.

하트랜드에서 비행쇼라도 해야 할까 싶어.”

여자는 그 앞에서 처음으로, 꿈이라도 꾸는 듯 몽롱하게 웃었다.

 

*

 

마지막 전투는 양측에 큰 출혈을 안겼다. 전쟁을 끝내러 온 정예병은 물론, 계속 세가 꺾이던 침략군마저 모든 것을 쏟아부어 싸운 탓이다. 사내는 돌아가지 못할 것까지 각오하며 전사들을 지휘했다. 그가 믿는 전사는 적진의 중심부까지 침투하여 공격을 퍼부어댔다. 수적으로 열세인 정예병이 하나둘 쓰러졌으나, 침략군 간부를 무력화하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마침내 사내는 생존자를 이끌고 침략군의 수장을, 아비를 끌어내렸다.

그러나 그 감격스런 결말을 가장 기다렸을 사람은 정작 종전의 순간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폐허에서 온 여자가 복귀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대한 임무를 안고 출격한 여자는, 임무 완수 이후 실종되었다. 통신을 시도해도 응답이 없었고 어디에서도 그녀의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사내는 복귀한 전사들에게 여자의 행방을 물었으나 대부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명, 그녀와 같이 나섰던 자는 겨우 입을 뗐다. 길이 갈라져 저는 다른 쪽으로 빠졌지만, 쿠로사키가 마지막으로 향했던 곳을 아카데미아가 집중적으로 공격했다는 것은 압니다.

[아마도, 격추되었을 것으로…….]

처참한 답변에 사내는 먼 하늘만 노려보았다. 여자가 기계 새를 이끌고 비행하던 곳을. 사내는 그 하늘이 그녀를 삼켜버린 것만 같았다.

탐색을 거듭해도 여자의 흔적은 포착되지 않았다. 제법 시간이 지난 후 해상에서 기계 새의 잔해만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사내는 병기의 잔해를 수거한 날, 왼손목에 팔찌를 꼈다. 그의 것이었던 적 없는 물품. 여자에게서 받아온, 그녀의 유품을. 여자가 끝내 복귀하지 못했기에 그녀의 다른 소지품은 찾아낼 수 없었다. 병기의 파편을 증거로 삼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때문에 사내가 쥘 수 있는 건 그의 물품과 교환했던 팔찌뿐. 그녀의 손목에 다소 헐렁했던 팔찌는 그에게는 딱 맞았다. 본래 제 것이었던 양 너무 잘 들어맞는 것이 사내는 서글펐다.

어느 날 갑자기 사내의 손목에 자리한 팔찌는 얼마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 걸, 좋아했던가요? 시시한 물음이 날아들 때마다 사내는 똑같은 답을 돌려주었다. 증거일 뿐이야. 어떤 기억을 남겨두기 위한 것. 그것이 원래는 타인의 팔찌였고, 돌아갈 곳이 없어 그의 손목을 죄게 되었음을 누구도 모른다. 털어놓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사내는 때로 자신의 왼손목을 들어 여자의 유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녀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는, 그녀가 없는 현재를 살며 조금씩 낡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