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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슌+세레나] 병기의 법칙

현소야 2020. 7. 20. 00:54

 

손에 쥔 생명은 따뜻했다. 그러나 그 온기가 곧 꺼질 불꽃임을, 양손으로 새를 감싼 소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작은 몸뚱이는 추락의 여파로 부서졌고 가냘픈 움직임은 점차 더뎌졌으니. 소녀가 입 밖에 내지 않은 미래를, 곁에서 지켜보던 소년이 무심하게 흘렸다. 그거, 죽어. ‘죽을 거야라는 가정도 아닌, 단정적인 예언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사람만 오래 못 버티는 게 아니어서. 덧붙인 목소리도 물기 없이 건조했다. 폐허에서 버텨온 소년은 종말에 덤덤하다. 수많은 상실과 사소한 죽음이 그의 삶에 쌓였기 때문이리라.

소년의 미지근한 태도에서 소녀는 그의 삶에 뿌리내린 불행을 떠올린다. 침략군이 밀려들었을 날과, 모든 것이 허망하게 흩어졌을 전쟁을 막연히 상상한다. 선명하게 그려내지 못하는 것은 직접 목격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방인인 소녀에게, 이곳을 덮친 불행은 타자의 불행이다. 노력해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비극이다. 그렇기에 소녀는, 추락한 새를 보며 덧없는 후회를 쌓는다. 죽음에 무뎌지지 못하고 종말을 안타까워한다.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행을 막고 싶어 한다.

너무 늦게 구한 것 같다는 생각, 하고 있지?”

속을 읽는 듯한 물음에 소녀는 움찔했다.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는 듯, 소년은 제 손으로 소녀의 양손을 덮었다. 죽어가는 새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빨리 구했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어. 아카데미아가 밀려든 후로 하트랜드는 완전히 죽음의 땅이 되었거든.”

군사가 짓밟은 땅이니까.”

먹이를 못 찾아서 죽는 게 아냐. 땅이 죽어서 못 버티는 거야. 그건 인간이 도울 수 없는 일이지.”

네 탓이 아냐, 세레나. 손 위에서 가련하게 떨리던 몸이 마침내 정지했을 때 날아든 위로였다.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메마른 친절이 오히려 가책을 키운다는 것을, 소년은 알지 못할 것이다.

태어나 자란 곳에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소녀는 침략자로서 이 도시에 닿았을 것이다. 문명을 파괴하고 절망을 쌓으며 소년 같은 이들을 수없이 짓밟았으리라. 소녀가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것은 침략자의 무기이며, 어린 날부터 배운 것도 영예로운 정복자의 방식이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소년은 상냥하다. 저항군의 기지를 허락하는 것은 물론, 얼마 되지 않는 식량도 소녀와 나누고 있다.

같이 묻어줄까?”

최대의 친절을 담아 건넨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이런 곳에서는 죽음을 너무 오래 애도해선 안 되었다. 슬픔이 길어질수록 종말의 무게가 더해지기 때문이었다. 땅을 파고 죽은 새를 묻어주는 대신, 소녀는 작은 몸뚱이를 헝겊으로 감싸 추락한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나마 풀꽃의 흔적이 남은 곳이었다.

여기선 뭐든 너무 많이 죽어서, 힘들지.”

생명이 떠난 새에게서 시선을 거뒀을 때 소녀에게 날아든 말이었다.

익숙해.”

슬픔을 짧게 털어내고 일어서며 소녀는 그의 덤덤함을 흉내 낸다.

대단하네. 나는 아직도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했는데.”

역시 슌을 닮은 것 같아. 동료여서 그런가. 장난스런 목소리로 덧붙인 말에 소녀는 숨을 크게 삼킨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들먹이는 말이 그녀를 날카롭게 찌른 탓이다. 소년이 상기시킨 이름은 먼 이국에서 함께 움직인 청년의 것이다. 정예병이란 이름으로 얽혔기에 같은 전장에 섰지만, 그는 소녀를 동료라 칭한 적이 없었다. 함께한 시간은 짧고 대단한 친분도 없다. 그럼에도 소녀가 청년의 이름을 슬쩍 두르는 것은, 그가 본디 이곳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한껏 경계가 깊어졌을 이곳 사람들에겐, 그들에게 익숙한 사람을 내세우는 것이 낫다. 청년의 이름을 방패 삼는 한 소녀는 이방인이어도 이곳에 섞여들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둘러댈 수는 없다. 희망을 찾아 고향의 전장을 떠난 청년은, 언젠가 이 지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평화도 끝난다. 소녀가 숨겨오던 바탕은 낱낱이 공개되고, 더는 이곳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말인데, 슌이 언제 여기 올지는 알고 있어?”

다만, 아직껏 소녀의 위장은 유효하다. 소년의 눈에 비친 기대가 그 증거. 소녀는 저를 믿어주는 소년에게 그가 바랄 답을 안겨주기로 했다.

거기까진 몰라. 돌아오리란 건 확실하지만. 차원 이동장치에 문제가 생겨 불시착하는 바람에 내가 먼저 왔을 뿐, 쿠로사키는 언제나 하트랜드로 향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다행이야. 슌은 아무래도 우리와는 다르니까. 슌이 합류하면 아카데미아에 맞서는 게 좀 더 편해지겠지.”

다르다니, 어떤 점에서?”

냉정하다는 점에서.”

생각지 못한 답에 소녀의 눈이 둥그레졌다.

쿠로사키가?”

슌은 어떤 상황에서든 흔들리지 않고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어. 원래도 적에게 관대하진 않았지만 루리가 사라지고는 완전히 싸늘해져서…….”

다음에 따라붙을 말을 소녀는 듣지 않고도 안다. 청년은 병기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발 닿는 모든 곳을 전장으로 취급하며, 어떤 상대든 쓰러트리는 것이 목표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냉정함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을지. 미래를 연료 삼아 적과 공멸하는, 극도의 황폐함이라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을 메우는 생각을, 소녀는 애써 가라앉힌다. 살아남기 위해 닳아버린 이들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다.

레지스탕스는 쿠로사키의 방식에 전부 동조했나?”

의견이 갈리긴 했지. 하지만 누구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어. 스페이드교의 레지스탕스가 전멸한 때는 슌의 빈자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미지근한 웃음을 걸치며 소년은 이야기했다.

옳은 것과 필요한 것을 따지는 건 어려워. 슌의 싸움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그런 방식이 하트랜드엔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야.”

울타리가 되어주었던 셈이군.”

그럴지도 몰라.”

어른이 필요한 거지. 우리는. 소년은 뼈대만 남은 벽에 기대며 이야기했다. 소녀와 거의 비슷한 나이인 소년은 저항군 중에선 그리 어린 편도 아니었다. 생존자의 연령대는 너무도 낮아, 소년보다 서너 살 위의 청년이 연장자 취급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런 소년들이 전사가 된 것은 명예 같은 그럴듯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침략이라는 재앙에 맞서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일 뿐. 보호자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

짧은 시간에 최대한 무장하기야 했지만,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던 아이들이 완벽한 군인이 될 수는 없다. 군사교육을 받고 밀려든 병사 앞에서 그들은 급조된 소년병에 지나지 않는다. 어른이라는 말에 깃든 기대를 대강 짐작할 것 같아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청년이 저보다 겨우 몇 살 아래인 정예병 멤버들 앞에서 언제나 보호자인 듯 군 이유를 알 것 같다.

랜서즈는 정예병이니까 아카데미아라는 군대에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사정이 못 되거든.”

쿠로사키가 어른처럼 나서야 한다는 점에선 랜서즈도 레지스탕스와 다를 것 없어.”

그쪽도 아이들이 대부분이란 말이야? 어디에도 어른은 없는 전쟁이라니.”

잔인하네. 소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 이 싸움엔 훈련받은 군대와 소년병만 있을 뿐이지.”

……세레나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기습적인 질문에 이번에야말로 소녀는 숨이 턱 막혔다. 의도를 짐작할 수 없어 소년을 응시했으나 소년 역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다. 깜빡임도 없이 오롯이 저에게 향하는 시선이, 소녀는 너무도 무겁다.

알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이 싸움에. 뒷말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침략을 겪은 사람이 희망을 완전히 믿기란 어렵다. 인간의 악의를 질리도록 경험한 이들이니만큼, 차가운 힘만을 믿고 희망에 냉소해도 놀라울 일은 없다. 그럼에도 소년은, 침략자에 맞서기로 선택한 소녀에게 희망을 묻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 소년은 아직껏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이 싸움이라는 표현에 생략된 부분을 소녀는 안다. 아이들끼리 엉킬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그러한 말을, 소년은 삼키고 있다. 이런 싸움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소년은 답을 재촉하지도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도 않았으나, 소녀는 그의 질문이 머리를 자꾸 울리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희망이, 있어?

아무리 이곳에 섞여들려 노력해도 이방인으로서 소년과 같은 입장일 수는 없으니, 소녀는 소년의 동지에게로 관심을 돌린다. 청년이라면 어떻게 답했을까. 소녀는 이곳에 없는 사람을 눈앞에 그린다. 먼 이국에서도 저항군의 표식을 지니고 다니던 남자, 자신의 열세마저 이용해 적을 섬멸하려 들던 청년을 떠올린다. 그라면 아마도.

없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싸움이나마 청년은 포기하지 않았다. 고향을 떠난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평화를 누려도 좋았으련만, 고향에서부터 간직해온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행방은커녕 생사도 모를 동생을 구해내겠다는 것이 그것. 이국의 정예병에 합류한 것도 고향의 전쟁을 끝내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자신을 소모하는 것은 황폐함의 증거인 동시에 목적을 실현해야 한다는 열망의 결과다. 소녀가 생각하기에 그는 희망을 버릴 만큼 냉정하지는 못하다.

그러니 소녀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스스로를 병기로 취급하는 청년이 그렇다면, 소녀는 더욱 희망을 믿을 수 있다. 단호한 답에, 소년은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낙관적이네, 세레나는.”

, 외부인이 그렇게 말하는 건 우습나?”

아니, 신기해서. 사실은 그런 말을, 듣고 싶었거든.”

물기 없는 목소리로 답하며, 소년은 시선을 저 먼 하늘로 돌린다. 소녀는 소년과 같은 곳을 바라보려 애썼지만 아무리 시선을 멀리 두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잔해뿐. 이런 곳에 살다 보면 잿빛만을 눈에 담을 수밖에 없다. 이 처참한 폐허야말로 그들의 현실이다. 소녀는 먼지를 한껏 들이마신 듯 속이 텁텁해진다.

이런 싸움이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서.”

랜서즈의 다음 목적지는 하트랜드야. 아카데미아로 향하기 전 이곳의 싸움을 끝내는 게 우리의 목표고.”

침략자가 될 수도 있었을 소녀에게 이곳의 모든 단편은 너무도 씁쓸하다. 소년을 달래듯 이야기하는 것은 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알렌. 무엇이든 절망 위에 덧칠해야 할 것 같아 소녀는 나오는 대로 이야기한다.

그렇게 되면.”

나아지겠지.”

어떻게 나아질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분명히 나아지겠지. 띄엄띄엄 말을 이은 소년은, 보물이라도 되듯이 소녀의 손을 조심스레 감쌌다. 희망이 날아가지 않게 붙잡고 싶은 것처럼. 상기된 뺨이,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그의 감정을 그대로 비춰주었다. 멋대로 흘린 것에 불과하나, 소녀의 약속이 그의 그림자를 걷는 주문이 된 듯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버틸 거야.”

드물게 가벼운 목소리가, 절망 섞인 말보다도 묵직했다. 자신이 낳은 결과이니 소녀는 그 말에 웃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소년을 따라 기지에 돌아가는 내내, 소녀는 소년의 얼굴 대신 뒷모습만을 눈에 담았다. 저에게 와 닿았던 순진한 기대를, 차마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

 

소녀의 삶은 뜻대로 흘러간 때가 많지 않았다. 열 살이 되기도 전에 통치자를 만난 것도, 그 후로 통치자 근처에 묶여 지내게 된 것도, ‘영예로운 전사로서 교육을 받은 것도 전부 그녀의 선택은 아니었다. 소녀를 온실에 가둔 통치자는 그녀와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곁을 지키며 행동을 감시하던 이들은 통치자의 뜻대로 얌전히 지내기를 강요할 뿐이었다. 전사로서 교육받는 것이란 소녀를 비롯해 그 나라에서 태어난 모든 청소년에게 부여된 의무였다. 길지도 않은 삶을, 소녀는 거의 타의에 짓눌려 살아야만 했다.

물론, 통치자가 아끼는 대상이었던 덕분에 소녀의 생활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시중드는 이가 여럿에, 대우는 통치자의 자식에 준했다. 겉으로만 보면 동화 속 공주의 삶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결국 감금된 공주였다. 외출이라도 하려 하면 어디서 나타났을지 모를 사람들에게 붙들려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으며, 원하는 것 하나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일반인과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또래 아이와 교류하는 일도 거의 금지되었다.

[이렇게 가둬둘 거면 왜 나를 데려온 거야?]

통치자에게 물었을 때, 소녀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내는 짤막하게 답했다.

[너는 내 목표에 필요한 조각이기 때문이지.]

절대 잃을 수 없으니, 틀어쥐고 있을 수밖에. 이어진 말은 사람보다는 보석을 대하는 듯해 섬칫했다. 그러나 통치자는 끝내 소녀가 어디에필요하고 무엇을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에게 제 가치를 증명하면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만 안겨주었을 뿐이다. 어떻게 가치를 증명할지 몰랐기에 소녀는 전공을 세우기로 했다. 저와 함께 교육받은 학생들이 이국을 정복하러 갔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훈련받은 전사를 이기지 못해 매일같이 쓸려나가고, 살아남은 이들은 다른 나라로 도망친다는 이야기와 함께.

다만 수많은 학생, 혹은 전사가 끝없이 동원되는 전장으로 가는 것은 망설여졌다. 소녀가 함께 전공을 세워 돌아가자고 설득한 감시역도 타인의 시선을 피하려거든 이국에 숨어든 패잔병을 잡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네 개의 나라 중 본국과 완전히 전장이 된 곳을 제외하면 두 군데가 남았다. 소녀는 그 중 더욱 안전한 곳을 택했다. 평화로운 세계이기에 이방인이 쉽게 섞여들 수 있는 곳. 패잔병도 안심하고 활보할 곳.

감시역이 같은 편이 되어준 덕분에 소녀는 쉽게 탈출했다. 언제나 몸을 옥죄던 곳에서, 통치자의 세계에서. 다음은 계획대로, 누구도 저를 모를 이국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스탠더드라 불리던 그곳에서 소녀는 목적을 이뤘다. 쓰러트려야 할 자를 만난 것이다. 저를 지켜줄 동지 하나 없는, 쓸쓸한 이방인을.

결과적으로 소녀는 그를 쓰러트리지 않았다. 붙잡으려다 실패한 게 아니라, 힘으로 꺾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를 구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타의에 지배당하던 삶이었는데, 통치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 그것만은 제 뜻대로 할 수 있었다. 하필 본국의 전사에게 쫓기던 그는 소녀의 도움으로 생존했다. ‘동지가 그를 덮치지 못하도록 방해했음에 소녀는 안도했다. 그것은 그동안 그녀가 배워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길이었음에도.

그때 소녀가 구해낸 사람이 바로, 이후 함께 정예병으로 움직이게 된 청년이었다.

청년을 구해낸 때를 기점으로 소녀의 삶은 조금씩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다. 여전히 통치자는 그녀를 노리고, 걸핏하면 그녀를 방해하려는 이들이 삶에 끼어들었으나 소녀는 분명히 제가 원하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바로, 본국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싸움이었다. 소녀의 적은 패잔병도 반역자도 아닌, 옛 동지들. 정복자를 자처하는 침략군이 되었다. 동지의 빈 자리는 같은 적을 둔 정예병 동료들로 채웠다.

타국을 정복한다는 것도, 패잔병을 사냥해야한다는 것도. 전부 세계를 삼키기 위해 상부에서 꾸며낸 말에 지나지 않았다. 청년의 삶이 그 증거. 침략의 피해자로서 모든 것을 잃은 청년과 그를 사냥하려던 침략군을 본 때 소녀는 오랜 꿈에서 깬 듯했다. 그 전까지 본국의 질서가 옳다고 생각해 따라왔다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때 완전히 버려야 했다. 잘못된 것을 부수고 옳은 길을 찾아가야 했다.

그러니 소녀에게 정예병으로 움직이는 것은 악을 몰아내고 잘못을 바로잡는 길이었다. 동료를 더 모으기 위해 낯선 땅으로 향할 때도, 그곳에서 저를 포획하러 온 추적자를 마주쳤을 때도 소녀의 생각은 흔들림이 없었다. 소녀를 방해하는 이들은 소녀에게 원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했으나 이미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소녀가 제일 잘 알았다. 계획이 틀어지지만 않았다면 소녀는 지금, 새로운 동료와 함께 희망을 안고 싸우고 있었으리라.

이번에도 타의가 개입해 그녀를 혼자 이곳에 날려버렸을 뿐이다.

몸은 괜찮아?”

무기를 점검하던 소녀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식량을 찾으러 나갔던 S가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청년의 동료라는 이유로 모두가 소녀에게 친절하기야 했지만, S는 특히 친근하게 구는 편이었다. 분명, 소녀가 이곳에 빠르게 적응하게 된 데는 S의 배려가 크게 작용했다. 또래 여자아이라는 점도, 소녀가 S를 편하게 느낄 수 있었던 이유.

다만 S가 소녀를 담는 시선엔 자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렇게나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이유가 있어? 소녀가 가볍게 물었을 때, S는 한참이나 망설이다 답했다. 루리가 생각나서 그래. S가 꺼낸 이름은, 청년이 그토록 찾아다니는 동생의 이름이었다. 하필 소녀와는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소녀가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그녀를 구해온 이들도 소녀를 청년의 동생으로 착각하고 데려왔던 것 같다. 희미한 정신으로도 그때 루리라는 이름이 반복적으로 들렸던 것만은 느낄 수 있었으니.

물론 청년의 동생과 소녀 사이엔 어떤 접점도 없었다. 소녀를 구해온 이들도 저들이 아는 사람과 소녀는 완전한 타인임을 빠르게 파악했다. 때문에 누구도 소녀에게 그 사람을 기대하진 않았으나, S는 소녀를 볼 때면 묻어둔 감정의 잔재가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나와 루리는 정말 친하게 지냈어. S는 가끔 소녀를 곁에 두고 이야기했다. 그럴 때 S의 시선은 소녀가 아닌 천장으로 향해, 소녀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기보단 독백처럼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난 루리가 사라지는 것을 막진 못했지.]

[아카데미아가 침략해오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야.]

건조한 위로를 얹은 날, S는 소녀를 보고 웃었다.

[……내 잘못도 없지는 않아.]

그렇게, S는 괴로운 감정을 뱉어내지 못하고 오래도록 속에 머금고 있었다. 이곳에 없는 사람 때문에. 소녀를 볼 때마다 그 사람이 생각나서. 그것이 S의 선택임을 알기에, 소녀는 S에게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말은 건네지 않았다. 청년의 동생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아무 일 없었던 듯 S를 대할 뿐이었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화제로 올리지 않는 한 둘의 관계는 언제나 평온했다. 소녀의 건강을 묻는 S의 어투는 여느 때처럼 상냥해, 소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알잖아, 이제 움직이는 덴 무리가 없다는 걸.”

이곳에 불시착하기 직전, 적의 수에 당해 부상을 입었던 소녀였다. 처음 기지에 왔을 땐 스스로 걷기도 힘들었으나 S의 도움으로 거의 회복했다. 그럼에도 매번 몸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S의 친절인 동시에 두려움의 증거다. 소녀는 S가 자신을 전장으로 내보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싸울 생각이야?”

필요하다면.”

디스크를 잃어버렸다며?”

하나 구하면 돼.”

아직은 모두가 막아주고 있는데? 세레나는 여기서 조금 더 있어도…….”

과연 S는 자꾸만 소녀를 전쟁으로부터 보호하려 든다. 소녀의 의사를 확인하자마자 소녀가 나서선 안 될 핑계를 들먹이는 것이다.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간다. 아마도, ‘다시잃고 싶지 않아서이리라. 소녀는 달래듯 부드럽게 답했다.

나도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순 없잖아.”

그럼 최소한 나머지 랜서즈가 전부 오고 난 후에 싸워줘.”

그 정도는 괜찮지? S는 급히 덧붙였다. 안경 너머 푸른 눈엔 조금이라도 오래 소녀를 붙들어놓고 싶다는 간절함이 비쳤다. 그것마저 외면할 수는 없어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실은 소녀 역시 이 전장에서 자유로운 처지는 아니었다. 이제는 적이 된 침략군에게 정체를 들키는 순간, 소녀는 다시 위험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소녀를 동료로서 보호해줄 이들이 이곳에 더 올 때까지는 몸을 조심하는 게 현명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까지는 모를 S, 소녀가 제 애원을 들어주었다는 것만으로 안심한 듯 얼굴이 밝아졌다. 바닥에 엉켜 잠든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피고서, S는 소녀의 곁에 살그머니 앉았다. 있지, 세레나. 아이들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S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깝게 작았다.

사실 여기 남은 사람들 전부, 어느 정도는 겁쟁이야.”

나는 특히 그렇고. S의 입가에 걸쳐진 웃음은 쓸쓸한 빛을 띤다.

네 일에 간섭하는 것도, 사실은 무서워져서 그래.”

루리 일 때문에?”

잃지 않게 지켜낼 자신이 없어. 루리가 사라진 날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서…….”

그 날, 한 발짝만 움직이면 루리를 구할 수 있었는데. 소리를 지르기만 했어도 다들 도와주러 왔을 텐데. S는 띄엄띄엄 말을 잇는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소녀는 온갖 감정을 읽는다. 이상하게 다 굳어버렸지 뭐야. 혀도 손도 전부. 눈앞에서 루리가 사라지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거야.

그렇게 가까이 있던 루리도 못 구했는데, 다른 사람을 지켜낼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런 생각이 드니 너무 무서워졌지.”

나도 사라질 것 같아?”

루리처럼. 생략된 말을, S는 아마 듣지 않고도 알았으리라. 내리깐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여기선 누구라도 쉽게 사라져. 슌이 하트랜드를 떠난 때도 자꾸만 겁이 났거든. 사실은 루리처럼 사라졌을까 봐. 자기 목숨도 미끼로 쓰는 슌이, 단신으로 아카데미아에 맞서다 영영 못 돌아오게 될까 봐.”

사야카.”

남매가 너무 닮았어. 세레나도 그래.”

거기서 S는 무릎을 안고 얼굴을 묻었다. 흐느낌은 새어 나오지 않았으나 소녀는 S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그 얼굴을 확인하는 대신, 소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쿠로사키는 성가신 놈들 곁에 있어. 조금이라도 다치면 호들갑을 떨고, 엉성하기는 해도 악의는 없는 애들 말이야. 그런 놈들은 손이 많이 가서, 쿠로사키는 혼자 튕겨나갈 수 없지. 나오는 대로 지껄여대자 슬금슬금 S가 고개를 들었다. 젖은 목소리로 S는 물었다.

세레나는?”

나도 비슷한 처지고.”

소녀는 S의 빨개진 눈을 모른 체하며 덧붙였다.

이렇게만 말하면 미덥지 않겠지만, 하는 행동이 어설픈 거지 전투에선 제 몫은 다 하는 놈들이야. 그런 애들이랑 움직일 거니 걱정할 필요 없어.”

도와주겠답시고 기지를 엉망으로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농담처럼 흘린 말에 S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에서, S가 소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녀는 약간 축축해진 S의 뺨을 쓸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려고?”

바로 시선으로 쫓는 S에게 소녀는 적당히 둘러댔다.

아카데미아의 전술을 대강 알아. 당장 싸우는 게 무리라면 아카데미아의 공격을 최대한 피할 길이라도 생각해야지.”

지금 나가겠다고?”

정탐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푸른 눈에 담긴 애원을 외면하며 소녀는 돌아섰다. 제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S가 안쓰럽긴 했으나, 소녀에겐 지금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침략자가 휩쓸고 간 자리. 저항군의 흔적 등. 이방인인 소녀에게 이곳 사람들이 일부러 보여주지 않지만, 소녀가 머릿속에 담아야 할 것들. S는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소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체념한 것인지. 홀로 빠져나온 소녀는 잿빛의 폐허를 소리 없이 걸었다. 누구도 그녀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걸음을 옮길수록 몸이 떨렸다. 달빛이 드리워지는 밤은 싸늘했고, 폐허에선 온기를 안길 것을 찾기 힘들다. 아마 오래 돌아보기는 무리일 것이다. 소녀는 우선 불행히도 전멸했다는 저항군 분대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소년이 말해준 대로라면 지금의 기지에서 멀지 않은 곳,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진 학원이었다는 건물.

장소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 침략자에게 끔찍하게 짓밟힌 분대는 전원 학생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보통의 아이들보단 조금 더 나았을지 모르나, 훈련받은 군인에게 대등하게 맞서는 것이 가능했을 리 없다. 청년을 비롯한 몇몇 핵심 멤버가 이탈하자마자 소수의 침략군에 전멸당했다는 것이 소년의 설명이었다. 씁쓸한 결말을 떠올리며, 소녀는 폭격의 흔적이 뚜렷한 건물에 들어섰다. 걷고, 또 걸어도 넓디넓은 건물에서 건져낼 것은 없다. 검게 그을린 벽은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고, 바닥엔 처참하게 부서진 배틀용 디스크가 나뒹굴었다.

이곳에서, 제대로 무장하지도 못한 학생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침략을 막으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소녀가 구역감을 애써 누르며 바닥에 떨어진 디스크를 주워 들여다보려던 때.

갑자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끼어든 발소리에, 소녀는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짧은 순간 무기를 꺼내는 것까지 생각한 소녀였으나, 다행히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은 적의 형체는 아니다. 창으로 새어드는 달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자는 낯익은 사람이다. 소녀는 물론, 이곳의 모든 생존자에게. 낡은 코트를 걸친 남자는 성큼성큼 소녀에게 다가온다. 내려다보는 금빛 눈이 달빛을 닮았다. 둘 사이의 거리가 몇 걸음으로 좁혀지자, 남자의 입이 열렸다.

……여기 있었나.”

세레나. 긁어내듯 거친 목소리는 소녀의 이름을 담는다. 그 목소리까지 들으면 확신할 수밖에 없다. 소녀 앞에 선 자는 분명히 청년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사실은 하나.

소녀의 극은 막을 내렸다.

 

*

 

마지막 감시역이었던 남자는 퍽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처음 말을 섞었을 때부터 소녀는 그에게서 낡은 병기를 떠올렸다. 실제 처지도 첫인상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전사로서 가치를 잃어 다시는 전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자. 한 줌 전공은 명예를 안기기엔 부족했고, 평생 전투 외에 익힌 것이 없는 통에 배치할 곳도 마땅찮았다. 결국 남자에게 돌아간 역할은 통치자의 보물인 소녀를 지키는 일. 말은 그럴듯했으나 실질적으론 소녀의 시종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모두가 알았다. 그나마 그 전의 감시역이 소녀의 탈출 시도를 바로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바람에 생긴 자리였다.

남자는 새 역할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아마 그도 눈치챘으리라. 그것밖에 제 길이 없음을. 이제 상부는 저에게 기대를 걸지 않으며, 어떤 전장도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는 한때 전사였기에 전사의 충성밖에 배우지 못했다. 한 가닥 불만도 없이 남자는 소녀의 곁을 지켰다. 맡은 것은 감시역인데 소녀에게 취하는 태도는 기사 같았다. 그 어설픔이, 순진하리만큼 뻣뻣한 모습이 소녀는 그저 시시했다.

공을 세워야겠어. 엑시즈의 패잔병을 프로페서 앞에 대령하는 거야. 감시역에게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소녀는 당연히 그 딱딱한 남자가 저를 설득하려 들 줄 알았다. 통치자에 제 말을 낱낱이 일러바친다 해도 놀랄 것은 없었다. 뜻밖에도 남자는 그 말에 눈을 빛냈다. 그거 좋군요. 저도 데려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못 진지한 반응에 소녀는 그가 전사의 길을 버리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명예를 쌓는 것을 진심으로 열망했다는 것도. 감시역을 제 편으로 돌리는 것은 소녀로서는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소녀는 그에게 기회를 약속하고서, 그동안 자신을 가둬두던 세계에서 도망쳤다.

결과적으로 둘은 실패했다. 소녀는 전공을 세우기는커녕, 패잔병을 구해냈다. 남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는데, 그 순간조차 그의 얼굴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비치지 않았다. 쓸모를 입증하지 못한 데의 아쉬움만 선명했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일 줄 알았더니, 소녀는 먼 이국에서 또다시 감시역과 마주치게 되었다. 동료도 없는 곳에서, 성치 않은 몸으로. 상부의 명령을 받아 왔다는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든 공을 세우고 싶은 남자가, 상부의 명령에 목숨을 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그러나 사건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소녀를 노리는 자가 또 하나 나타나는 바람에, 그녀를 데려가야 했던 감시역마저 부상을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힘을 쓰지 못하는 소녀가 납치되기 직전 그는 마지막 발악으로 소녀를 이동시켰다. 그들의 출신지를 비롯, 네 개의 나라로 이동할 수 있는 장치를 발동시킨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충성밖에 배우지 못한 그 남자에게 최초의 반역이었다. 소녀는 통치자의 곁이 아닌, 이곳에 떨어졌으니. 왜 그는 소녀를 다른 곳으로 빼돌렸던가. 그것도 왜 하필 전장이었던가. 생각을 거듭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상부의 뜻을 거역한 감시역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리라는 암담한 미래만 떠오를 뿐이다. 그래도 소녀에게 불시착은 나쁘지 않았는데, 잠깐이라도 적의 추적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 하나 이유를 찾자면, 강제로 이동되는 과정에 출신지를 파악할 수 있을 소지품을 거의 잃었다는 것.

이곳 사람들에게서 침략자로 인한 트라우마를 확인할 때마다, 소녀는 저에게 침략자의 흔적이 남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본국에서부터 지녔던 배틀용 디스크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다들 소녀의 출신을 알아챘을 것이다. 침략자의 디스크를 지닌 소녀를 받아주지 못하는 건 물론, 전쟁의 악몽으로 고통받아야 했으리라. 침략자에 맞서기로 결심했지만 소녀는 자신의 과거 자체가 이곳에서 용인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잃어버린 디스크를 굳이 찾지 않았던 것인데.

소녀는 청년의 등을 보고 걷고 있었다. S의 걱정을 피해 바깥에 나올 핑계를 찾던 중, 마침 청년이 기지를 나서려는 것을 보고 따라붙은 것이다. 한참이나 따라가도 반응이 없어서 제 존재를 못 느끼나 했더니, 어느 순간 청년이 걸음을 멈추었다. 다음은 소녀에게 불쑥 무언가를 건네는 일이었다. 아무 말 없이 눈앞에 들이밀어진 것을 소녀는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받고 보니 이곳 사람들이 쓰는 디스크였다. 저항군 동료로부터 소녀가 배틀용 디스크를 잃어버렸단 것을 들은 것인지.

며칠 전, 옛 저항군 근거지에서 만났던 두 사람은 조용히 기지로 복귀했다. 그나마 소녀가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면 함께 걸으면서도 한마디도 않고 돌아올 뻔했다. 정예병 멤버는 몇 명이나 온 것이냐는 물음에 청년은 처음엔 손가락 4개를 펴 보였다. 나머지 셋은 누구인데? 다시 묻자 돌아온 것은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교복 입은 놈들.

[그 셋은 어디 두고 혼자 왔지?]

[놈들은 알아서 여기에 적응하려는 듯해서, 내 일을 하러 왔을 뿐이야.]

점검이지. 덧붙인 말은 덤덤했다. 청년이 고향을 떠난 후 오래지 않아 저항군 한 분대가 전멸했다. 청년이 그들의 본거지를 굳이 찾아왔던 건, ‘살아남았을지도모른단 희망 때문이었을까. 혹은 옛 동지들의 종말을 직감하고 마지막 흔적이라도 훑으려 했던 것일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아버렸으므로, 소녀는 알 길이 없다.

기지로 들어서자마자 둘은 정예병 멤버 셋과 만났다. 세 쌍의 눈동자는 청년의 곁에 선 소녀를 확인하자마자 둥그레졌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소녀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과거를 알아선 안 될 저항군 앞에서라면 더욱. 소녀는 이동장치에 문제가 생겨 불시착했다 따위의 말로 설명을 마쳤다. 아무도 의문을 흘리지 않아 소녀가 마음을 놓았을 때.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근데 괜찮겠어, 세레나? 혹시 아카데미아가 너를 알아보면 곤란하지 않나?]

[왜 알아봐? 세레나도 쫓긴 적이 있어?]

그때 S가 불안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가만히 두면 소녀가 전장에 나서선 안 될 이유를 또다시 찾아낼 듯했다. 소녀가 적당히 얼버무리려 할 때, 상황을 모르는 상대가 먼저 입을 뗐다.

[그야 세레나는 원래.]

[스탠더드에서부터 쫓겼으니까. 아카데미아가 세레나를 표적으로 삼았어.]

모두의 시선이 갑자기 끼어든 청년에게로 향했다. 기지에 돌아오자마자 자기 일에만 열중하더니, 대화를 듣고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싱크로까지 징그럽게도 따라붙더군. 그래도 세레나가 하트랜드에 있다는 건 아직 모를 거다.]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함께 움직였던 세 명의 멤버에게 눈짓했다. 그 이상 말을 얹지 말라는 뜻이 선명한 행동이었다. 그의 뜻대로, 그리고 소녀의 바람대로 셋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청년이 나서준 덕분에 소녀는 출신지도 이곳 사람들에겐 끔찍하기만 할 과거도 들키지 않고서, 전처럼 저항군 기지에서 지내고 있다. 그때의 일엔 감사하긴 했으나, 뜻밖의 도움은 그 날로 끝인 줄 알았는데.

메마른 친절은 이번에도 이어졌다. 소녀의 시선은 청년이 내준 디스크에 오래 머물렀다. 동료라 말하기엔 먼 타인에게, ‘동지들이 쓰던 것을 내준 것인가. 그것도 침략자가 될 뻔했던 사람에게라니. 청년의 속내가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

엑시즈의 디스크라. 나를 동료로 받아줄 생각은 있다는 건가?”

글쎄, 너도 언제까지나 박혀있을 생각은 없을 것 같아서였다만.”

무미건조한 답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따로 디스크를 구하지 않았던 것은 S의 걱정 때문이었을 뿐. 정예병이 된 이상, 그리고 이곳에 온 이상 소녀는 어차피 언젠가는 전장에 나서야 할 처지였다. ‘저항군과 같은디스크를 쓴다면 문제 될 것도 없다.

디스크는 많이 남아있다. 주인 없는 것이니 하나쯤 챙겨도 돼.”

다만, 청년의 덤덤한 말이 한순간 숨을 막는다. 그에 깔린 것은 너무 많은 사람을 잃고 만 저항군의 현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얼마든 더 잃을 수 있는, 절망적인 상황. 들여다보기엔 너무 깊은 비극이라 소녀는 더 파헤치지 않는다. 오랜만에 디스크를 착용하며, 사소한 질문을 던질 뿐이다.

여기서 싸우고 있으면, 나머지 랜서즈가 전부 올까?”

글쎄.”

확신은 없군.”

전장에선 언제든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두는 게 좋아. 그래도 지금은 레지스탕스만이 아니고, 랜서즈의 도움도 일부 받을 수 있지.”

랜서즈를 희망으론 생각해주는 건가.”

돌진할 수 있는 놈이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좋으니까.”

네 생각은 따라가기 어려워.”

이미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에선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러한 뜻을 알아챈 것일까, 청년은 텁텁한 답을 돌려주었다.

그럴 수밖에. 동료들에게도 별로 이해받진 못하는데.”

그건.”

이해를 원하진 않아. 필요를 찾을 뿐. 너라면 이 싸움의 필요는 알고 있겠지.”

아카데미아였으니까. 소녀처럼 디스크를 차면서 청년은 무심하게 덧붙인다. 소녀에게 전투를 익히게 한, 침략군의 명칭은 전쟁 피해자의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이제는 적이 된 옛 소속의 이름에 소녀는 어떤 감정도 품지 못한다. 교관이 집요하게 가르치던 것들이 떠오를 뿐이다. 전사의 자세. 전투와 관련된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괴상한 논리들. 지나고 보니 비정상적이었던 모든 것.

물론 소녀는 그 비정상적인 세계로부터 도망쳤다. 침략군을 적으로 삼으며 전투를 끝내기로 다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침략자의 방식을 배운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청년이 자신의 과거를 인지하면서도 비난을 얹지 않는 것이 소녀는 되레 불안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쿠로사키.”

뭐지.”

내가 아카데미아 출신이란 걸 왜 주변에 말하지 않았지?”

할 필요가 있나? 여기 사람들이 그 이름에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뻔히 아는데.”

동지들을 위해서? 그것뿐?”

거짓은 없잖아. 우리가 만난 곳은 융합차원이 아니라 스탠더드니까.”

그 말만 남기고 청년은 성큼 앞장섰다. 뒷사람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걸음이라 고작 몇 걸음 만에 소녀와는 거리가 꽤 벌어졌다. 어차피 그녀와는 타인임을, 동료조차 못 된 관계임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거기서 소녀는 저도 모를 감정에 휩싸였다. 청년의 냉랭함을 부수고 싶어졌다. 청년을 따라 걸으며, 소녀는 그의 등에 말을 꽂았다.

같이 싸워줄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좋다? ‘전사를 하나라도 더 확보해야 하니까, 어제의 적이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에 청년은 잠깐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뿐, 이내 다시 걸음을 옮긴다. 부러 비꼰 말에도 청년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금빛 눈에는 우리는 원래 그 정도의 사이인데같은 말이 달라붙은 듯했다. 그 덤덤함이 황폐함의 결과인지 아니면 적이었던 소녀에 대한 체념의 증거인지, 소녀로선 알 수 없다. 전부터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혹은 들여다보기 두려운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소녀가 만난 가장 처참한 폐허였고,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를 상기시키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래서 소녀는 지금껏 청년의 본심을 확인하지 못했다. 아니, 확인하지 않았다. 정예병이 되어 이국을 다닐 때도, 침략자에 대한 청년의 적개심을 확인했을 때도, 청년의 이름을 내세워 이곳에 섞여들면서도. 한 번쯤은 확인해야 한다. 청년의 세계를 한 번 찢고 들어가서라도. 대답해, 쿠로사키. 소녀는 으르렁거렸다. 거친 태도에 청년은 겨우 입을 뗐으나 그가 흘린 말은 소녀가 듣고 싶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트랜드엔 트랩이 많이 깔려있지. 내가 먼저 걸으면 너에겐 큰 위험은 없을 거야.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냐.”

나를 따라온 건 같이 싸우겠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는데. 잘못 생각했던 건가?”

정말 그 정도의 감상밖에 없나? 당장 네 등 뒤에 있는 게 아카데미아인데도?”

나는 말이지, 세레나.”

그제야 청년은 소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걸음을 멈추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소녀에게로 걸어오는 것은, 소녀의 정공을 피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청년이 걸어올수록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진다. 둘 사이의 벽도 허물어진다. 이 순간, 그들은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마침내 소녀의 눈앞에 섰을 때, 청년은 말을 이었고.

네가 이런 취급을 바랄 거라 생각했다.”

아카데미아의 변절자가 아니라, 프로페서가 노리는 것이 아니라, 전사로 대하는 것 말이야. 따라붙은 말에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역할 이외의 다른 것으로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출신도, 통치자가 멋대로 부여한 가치도, 과거도. 그녀가 내세우는 정의보다 의미가 크지는 않다. 타의에 지배당해온 소녀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으로 평가받길 바랐다. 함께한 시간이 짧은 청년이 제 소망을 읽어냈다는 것은 놀랍지만, 그것으로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너는 나를 믿을 근거가 없잖아.”

가라앉은 목소리에, 이번에야말로 청년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너는 무얼 믿고서 날 구해줬지?”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데.”

엑시즈의 패잔병을 잡으러 왔다면서, 막상 찾아내니 보호해줬단 말이지. 다음엔 아카데미아에 맞선다는 랜서즈에 들어갔고. 스탠더드에 올 때의 세레나와 나를 구한 때부터의 세레나 사이의 공통점은 하나뿐.”

전사라는 것?”

그래. 그것만은 나와 같아. 다른 건 네가 버린 것이고 나와 무관한 것이기도 하니, 이제는 관심 없어.”

그것으로 됐겠지. 금빛 눈이 묻고 있었다. 기지를 나선 이유는 정탐이나 전투였을 테니, 빠르게 대화를 종료하고 원래 목적에 충실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의문의 답이야 이미 얻어냈으니 소녀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청년이 저에게 조금이라도 자기 이야기를 한 것에 만족하며, 지금의 관계에 멈추어도 좋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소녀는 더 나아가고 싶었다. 청년이 내면을 열어 보인 때 몇 걸음 더 들어서야만 했다. 지금이야말로 관계를 진전시킬 기회다 디스크에 무기를 세팅하는 청년에게, 소녀는 자신만만하게 요구했다.

그럼 말해줘. 동료로서 같이 싸울 수 있다고.”

동료라는 이름이, 필요해?”

필요해.”

나머지 놈들에게 들어도 되잖아. 랜서즈라는 이름으로 묶인 건 나뿐만이 아닌데.”

아니. 내게 필요한 건 쿠로사키 슌의 말이야. 여기는 네 고향이고, 우리가 맞닥뜨리는 건 일차적으론 너의 적이니까.”

잔해를 등진 남자는 오래도록 소녀를 눈에 담았다. 긴 침묵 끝에 청년의 입술이 열렸고.

그런 말은 못 해.”

침중한 답이 잿빛 도시에 울려 퍼졌다.

 

*

 

그 날 소녀는 청년에게 답을 더 조르지 못했다. 더 물을 의욕도, 그를 설득할 자신도 없어서였다. 자신의 무기인 기계 새를 조종하고 침략군을 쓰러트리는 청년에게서 그녀가 파고들 틈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소녀가 적습을 막아줄 때조차도 청년은 무뚝뚝하게 감사를 표하고 그녀의 실력을 칭찬할 뿐. 조금 전의 거절을 거둬들이는 일은 없었다. 청년은 그녀에게서 과거의 적이라는 족쇄를 풀어주었으나 동료라는 이름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임에도 씁쓸함이 남았다. 어쩌면 저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은, 청년에게 타자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 것일까. 혹은, 그를 구했던 것만으로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멋대로 생각한 것일까. 어느 쪽이었건 보답받지 못할 마음이었음은 분명했다. 청년은 편한 답을 꾸며내지도 않았으니까. 청년에게 동료란 너무 무거운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뒤늦게 들었다.

레지스탕스에게 동료란 어떤 존재지?”

다음날 S에게 물은 것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청년에게 동료란 어느 정도의 무게인지에 대해. 소녀는 청년과 함께 침략의 생존자인 S라면 비슷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다. 답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S는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간결하게 답했다.

같이 싸워줄 사람?”

쿠로사키에겐 아닌 것 같던데.”

슌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을걸. 우리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어떤 점에서?”

그거야.”

S는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청년과 함께 온 정예병 멤버 하나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잃은 게 많아서?”

사와타리의 말도 일리가 있네.”

이것 봐, 사야카도 인정하잖아.”

잃은 게 많다, .”

청년의 처지를 정확하게 요약하는 문장을, 소녀는 입에 올려보았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곳의 모두가 많은 것을 잃지 않았던가. 상실은 일상이고 불행은 흔하다. 그것만으로 청년이 타자에게 선을 긋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소녀를 자연스레 받아들인 다른 이들과 청년의 차이점이란 무엇이었을까. 생각에 빠진 소녀에게, 정예병 동료는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런데 세레나는 왜 그런 걸 궁금해해? 어차피 랜서즈로 함께 움직이는 한 우리는 동료인데.”

신경이 쓰여서 그래.”

. 세레나는 우리랑 끝까지 같이 있지 않았으니 쿠로사키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모르지? 시티에 처음 떨어질 때만 해도 제멋대로 다녀서 기가 빠질 지경이었는데 나중엔 제법…….”

사야카!”

다급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기지에 막 들어선 소년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잔뜩 겁에 질린 채. 두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흘러내리는 피가 붉은 얼룩을 만든다. 소년이 아닌, 그가 데리고 들어온 청년에게서 흐르는 것이었다. 디스크를 찬 왼팔에, 처참하게 찢긴 상처가 보였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힘겨웠는지, 동료들에게 닿자마자 청년은 무너졌다. 바닥에 피가 무섭게 번졌다.

이곳에서 그나마 의학적 지식이 있는 S가 바로 상태를 확인하려 청년에게로 향했다. 무엇이든 돕고 싶어 S의 곁에 선 소녀는, 청년의 다친 팔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제법 깊은 상처인데도 지혈의 흔적이 없다는 사실.

알렌. 상처를 묶을 것도 없었어?”

S의 물음에 소년은 반쯤 울먹이며 답했다.

그게, 응급처치라도 하려고 했는데 팔에 손을 못 대게 해. 뭔 힘이 남았는지 자꾸만 사납게 굴어서.”

소년의 말대로 상처 부위에 손을 댈 때마다 날카롭게 반응하는 청년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소녀는 청년이 띄엄띄엄 흘리는 말에 주목했다. 아직, 무장을 풀어선, 안 돼.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운 목소리로 청년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거기서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소녀는 몸을 숙여, 청년에게 속삭였다.

싸우지 않아도 돼.”

소녀가 추측하기에 청년이 누구도 상처를 살피지 못하도록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디스크를 풀고 싶지 않아서였다. 출혈로 의식이 흐려진 상황에서도 계속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리라. 적을 다 쓰러트리지 못해서, 혹은 아직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해서. 과연, 청년은 동요했다. 소녀는 청년의 눈에서 독기가 걷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은, , 안 끝났어. 아카데미아 놈이 쓰러진 걸, 확인 못 했다고.”

이제 알렌은 안전해. 문제가 생기면, 내가 나서서 싸워. 내 전투력만은, 너도 믿겠지.”

그러자 디스크에 올려두었던 청년의 오른손이 스르륵 떨어졌다. S가 상처를 살피는 동안 청년은 조금의 저항도 없이 얌전했다.

고비를 넘긴 청년이 잠든 후, 소년은 상황을 설명했다. 두 사람이 수상한 기척을 감지했을 때 하필 그들이 본 것은 여러 명의 침략군이었다고 한다. 일대 다 특화의 무기를 가진 청년은 자주 쓰는 전술을 빼 들었다. 자신을 미끼 삼아 공격을 집중시키고, 이후 열세를 트리거로 하는 함정을 발동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함정을 발동하여 전세를 뒤집을 때만 해도 계획대로 될 것 같았다. 위험을 제거하고 무사히 복귀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트랩이 있었던 거야.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이며 이야기했다.

승기를 잡은 청년이 적의 행동을 봉쇄하고 마지막 일격을 날린 때. 주변의 트랩이 발동되었다. 저항군의 공격이 발동 조건이었는지, 그 순간 우연히 발동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바로 근처에 서 있던 소년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었던 소년은 다행히도 부상을 피했다. 청년이 자신의 기계 새를 날려보내 그를 피신시킨 덕분이었다. 그 순간 방어막이 없었던 것은 청년뿐. 매캐한 연기가 걷히고 소년이 정신을 차렸을 때, 청년은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다. 놈들이, 없어. 청년은 다친 팔을 움켜쥐면서도 자꾸 적의 흔적을 찾았다. 놈들이, 안 보여, 알렌.

다음은 모두가 아는 대로. 소년은 청년을 데리고 급히 기지로 복귀했다. 청년이 팔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지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서.

그 자식들, 아마 도망갔겠지만 한동안 여기 얼씬거리지 못할 거야. RR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냈다면 그쪽에게도 타격이 컸을 테니까.”

트랩에 휩쓸려줬다면 더 좋고. 소년은 그렇게 말을 마쳤다. 괜찮은 체 허세를 부리지만 앳된 얼굴엔 여전히 불안과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마 모두가 그럴 것이다. 목숨을 건졌다는 것에 안도할 뿐, 다친 동료에 대한 걱정을 떨쳐내진 못하리라. 이번 일로, 많이 놀랐지. 소녀가 속삭였을 때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슌이 그렇게 다친 건 처음이어서.

솔직히 무서웠어. 피는 자꾸만 흐르는데 슌은 말을 듣지 않고. 그 몸이 자꾸 나한테 기울어지는 게 꼭…….”

잘못될 것 같아서. 뒷말은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잠든 청년을 내려다본다. 지독하게 창백한 피부와 일그러진 표정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지금의 청년은 평소와 다르게 너무도 연약하게 느껴진다. 깨지기 쉬운 공예품이라도 보는 것 같다.

팔은 괜찮겠지?”

당장은 불편하겠지만, 사야카의 말대로라면 아마 큰 문제 없이 회복할 거다.”

세레나는 어떻게 안 거야? 슌이 디스크를 안 풀겠다고 고집부렸던 거.”

동류니까.”

짤막한 답변에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소녀는 웃어버릴 뿐 더 설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야기해봐야 타인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소년은 끝내 바라던 답을 얻지 못했지만 소녀는 청년의 부상을 계기로 내내 머릿속에 머물던 의문을 해결했다. 이제 소녀는 안다. 청년이 왜 그녀에게 동료란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그가 생각하는 동료란 무엇이며, 타자가 말하는 동료와는 어떻게 다른지.

동류라는 말은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소녀는, 어쩌면 청년을 오래 지켜봐온 그의 동지보다도 그의 사고방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어떤 의미에서 둘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것을 익혔다. 둘 사이 접점을 만든 것이 침략자의 악랄한 행동이란 사실이 아이러니할 뿐.

생각이 많아 잠을 들이기 어려운 밤이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소녀는 새어드는 달빛을 바라보며 청년을 떠올렸다. 피를 흘리면서도 무장을 풀 수 없었던 자. ‘싸워줄 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친 몸을 맡길 수 있었던 사람. 승리할 때는 물론 위기에 몰린 순간조차도 전투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을 수 없는 남자. 청년은 어쩔 수 없이 전사였다. 스스로를 날이 잘 드는 무기로 만들려 드는 것이 그라는 사람이었다. 전투를 통해서만 사랑하는 것을 지켜내고, 보호해야 할 것을 잃지 않을 처지이기에 그렇다.

그 처절한 생존법에 소녀는 동질감을 느낀다. 그녀 역시 전사이기 때문이었다. 청년과는 시작점이 달랐을 뿐, 그녀도 나아가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점은 다를 것이 없다. 청년에게 전투란 얼마나 의미가 큰 것인지 알기에, 그녀는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저를 향한 냉랭한 태도조차도. 청년에게 동료란 이름은, 소녀가 추측하기에는.

거기서 생각이 멎었다. 낮은 신음에, 소녀는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죽은 듯이 잠들었던 청년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잠든 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다가서자, 청년은 빛을 잃은 눈에 소녀를 오롯이 담는다.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돼. 잘못하면 상처가 벌어져서 다시 피가 흐를 거라더군.”

조용히 타일렀더니, 청년은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디스크와 덱이 없어.”

물론 없겠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소녀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사야카를 더 고생시키기 싫으면 조금 더 쉬고 있어.”

꿈을 꿨는데.”

그럼에도 청년의 입술은 닫히지 않는다. 그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한다. 내가, 못 처리한 놈들이, 알렌을 찾아 공격하는 거였어. 놈들은, 얼굴을 익혀두면.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도 해. 마지막까지, 확인해야. 하는데. 통증에 짓눌려서인지, 청년은 꼭 꿈에서 깨지 못한 것처럼 군다. 불안에 잠겨서, 성치도 않은 몸을 움직이며 어떻게든 자리를 벗어나려 든다. 앓고 있으면서도 그의 생각은 이미 바깥의 전장에 닿아있다.

확인, 하게 해줘. 한 번이면 돼.”

아카데미아는 오늘 알렌을 노리지 못해.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루리는,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납치됐어. 유토도, 나와 떨어져 있을 때 당했고. 시선을 떼면 전부 잃게 돼. 내 주변 사람을 지키려면, 싸우지 않으면.”

알고 있어. 네 방식.”

숨이 막히도록 싸워야 하는 이유도, 전장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도. 전부 알아. 소녀는 청년을 안으며 말을 잇는다. 열로 뜨거워진 몸을 체온으로 식혀주어서인지, 처음엔 버둥거리던 청년은 차차 얌전해진다.

그러니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네 동료가 될 수 있다고.”

내게 동료라는 건.”

지켜야 할 만큼 소중한 사람. 그게 아니라면 같은 위치에서싸워줄 사람. 맞지?”

병기에 가까워졌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전쟁에 삶을 걸어버린 청년이었다. 그와 대등하게 서려면 단순히 같은 싸움에 뛰어드는 것만으론 되지 않는다. 전투의 무게를 이해하고 그와 같은 각오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소녀는 청년이 정예병 멤버들을 쉽게 동료로 인정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평화로운 세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선발된 열네댓 살 학생들이 그가 생각하는 <전사>의 이미지에 들어맞을 리 없다. 그동안 쌓은 것이 있다 해도, 고향에서 함께 싸우며 위기를 넘겨온 동지들과는 무게가 다를 수밖에.

그나마 전사로 인정했던 소녀에게도 동료의 이름을 약속하긴 어려웠으리라. 동료로 취급한다는 것은, 소녀에게도 자신처럼 싸우라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너무 많은 상실과 일상적인 절망으로 황폐해진 청년은, 외부인에게만은 저와 같은 비극을 맛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청년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도 소녀를 걱정한다. 그런 게, 되려 하지 마. 그런 싸움을 할 필요, 없으니까. 흩어질 듯 여린 목소리에 소녀는 웃었다.

무리하는 게 아냐.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야.”

……자랑스런, 전사. 같은 건 전장엔 없어.”

알고 있으니 아카데미아를 버리고 랜서즈가 된 거지.”

거기서 소녀는 청년을 안은 팔을 풀었다. 청년의 얼굴은 여전히 핏기가 없고 눈빛은 흐렸으나 조금 전 같은 극도의 불안은 비치지 않는다. 소녀는 그를 시선으로 묶고서, 힘주어 말했다.

잘못된 걸 바로잡기 위해서 아카데미아를 꺾겠다. 그게 내 싸움의 바탕이야.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서 전장에 선 거라고.”

전투가 삶의 방식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같은 처지다. 그러니 우리는 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소녀는 그러한 말을 전하고 싶었다. 청년의 고독한 세계에 동료로서 함께 서주고 싶었다. 청년은 소녀의 소망에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미지근한 웃음이 입가에 걸리긴 했으나, 그가 입을 뗀 것은 침묵을 제법 끌어간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정의인가. 너답다고 해야 할지.”

역시 우리와는 다르군. 그런 점은 조금 부럽기도 해. 청년은 이제 숨을 헐떡이지 않고 문장을 말한다. 흥분이 걷혀서인지 그를 괴롭히던 통증과 악몽에서 해방되어서인지. 어느 쪽이건 안정되었다는 것이므로 소녀는 안도한다. 그를 다시 누이고 재우려 할 때 이번엔 청년이 소녀의 팔을 잡았다. 다치지 않은 오른팔로, 소녀가 최후의 희망이라도 되는 듯 강하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잠깐 밖에 나갔다 와야겠어. 한 번만 눈감아줘.”

혼자선 안 돼.”

도통 물러서는 법이 없는 고집에 소녀가 고개를 가로젓자, 청년은 슬그머니 협상을 시도해온다.

동료와 함께라면?”

가능하지.”

청년에게 따라붙어, 위기 상황에 그를 보호해줄 동료라면 지금은 하나뿐. 어른 몰래 장난을 꾸민 아이처럼 두 사람은 키득거렸다. 소녀는 무기와 디스크를 품에 넣고, 청년과 함께 기지를 빠져나왔다.

 

*

 

긴 그림자가 땅에 드리워진다. 달빛을 받으며 걷는 두 사람의 것이었다. 청년과 소녀는 누구도 깨우지 않고 바깥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평소라면 청년이 고집스레 앞장서겠지만, 오늘 먼저 걷는 것은 소녀였다. 붕대를 감은 왼팔에 디스크를 차기란 어렵다. 다수의 적을 맞닥뜨린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소녀가 위험을 막으면 된다. 청년이 말없이 소녀의 뒤에 따라붙는 것은 자신의 처지를 냉정하게 파악한 결과인 동시에 소녀를 신뢰한다는 증거다. 그녀라면, 저와 같은 전사라면, 두 사람 모두를 지켜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둘에겐 다행스럽게도,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소녀가 무기를 꺼낼 일은 없었다. 트랩이 발동된 탓에 아마 적군도 상황을 살피며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 디스크를 찬 소녀는 모든 기척에 기민하게 반응했으나 대개는 이 폐허에서 겨우겨우 버티는 몇 안 되는 동물의 기척이었다. 이것 봐. 아무 문제도 없잖아. 청년의 소망대로 그가 부상을 입은 장소를 찾은 소녀는 뒷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겁을 먹어서라도 알짱거리지 않을 거라고.

……흔적이 아예 없는 걸 보니 정말로 도망쳤군.”

청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으나, 주변을 더 돌아봐야 한다는 주장은 없었다. 기지를 나설 때부터 소녀와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위험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 그 이상 파헤치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믿고 돌아간다. 전부, 청년의 강박적인 불신을 알기에 꺼낸 말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선 도통 타인의 말을 듣지 않던 청년이었으나 동료에게까지 고집을 세우진 못했다. 한숨을 쉬며 물러서는 건, 지금 확인한 결과를 수긍하겠다는 뜻.

괜한 일로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게 됐다.”

나쁠 건 없어. 이것으로 너도 안심했을 테니.”

이제 돌아갈까. 소녀의 말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그의 시선은 자꾸만, 핏자국이 남은 땅에 머문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그가 슬금슬금 돌아보는 것을, 소녀는 감지한다. 지난 것을 눈에 담는 것은 잃은 사람의 특징이다. 눈앞의 현실을 볼 수 없어 과거에 묶인 듯 구는 것이다. 쿠로사키. 청년을 현재로 끌어오기 위해 소녀는 그를 불렀다. 금빛 눈은 여전히 바닥을 비춘다.

.”

결국 소녀는 한 번도 꺼내본 적 없었던 이름을 입에 올린다. 그제야 청년이 소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소녀를 비롯한 정예병 사이에선 본디 성씨로 불리는 청년이었다. 갑자기 이름이 불리는 바람에 청년은 저도 모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전쟁 전부터 그와 친분이 있었던 동지들이니까.

그러나 청년은 언제까지나 그들만을 품고 살 수 없다. 대부분의 동지가 묻힌 과거에만 머물 수도 없다. 그는 산 사람이기에 이 시간에 적응해야 했다. 동료로서 소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와 함께 싸움을 끝내 하루라도 빨리 그의 불행을 끊는 것. 청년이 더 잃지 않아, 더는 과거에 매이지 않도록 하는 일. 다만 그것은 미래의 일. 지금 소녀가 해야 할 것은 그의 경계를 최대한 허물고 그의 현재가 되는 것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이 시간에 시선을 둘 수 있도록.

왜 너를 구했느냐고 물었지. 이유를 알 것 같아.”

때문에 소녀는 고백한다. 적당히 묻어두고 있었던 과거를. 부러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유가 있었다니 놀라운데.”

쇼크를 받아서였어. 내가 알던 세계가 갑자기 뒤집혀서.”

부끄럽지만 내 세계는 잘 만들어진 새장이었거든. 빠져나가고 싶어 하면서도,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랐어.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꺼낸 적 없는 이야기를 흘릴 때, 소녀는 청년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은 오롯이, 그녀를 담고 있다.

아카데미아에서 빠져나왔던 것도 막연한 반항이었을지도 몰라. 엑시즈의 잔당을 잡아 처리하자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 잔당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나?”

살아남겠다고, 지켜내겠다고 처절하게 싸우는 자는 내가 배워온 사냥감이 아니었어. 평범한 시민을 짓밟는 자가 자랑스러운 엘리트가 아니란 것도 분명했고.”

허상이 벗겨진 순간이군.”

짧은 순간에 깨달은 거야. 내가 무엇을 지키고 어디에 맞서야 하는지.”

잘못된 것을 부숴야 나아갈 수 있다지만, 자신의 세계가 한 번에 붕괴하는 순간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 없다. 소녀는 청년을 만난 때, 십 년이 넘도록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려야 했다. 온갖 감정이 급류가 되어 몰아친 것은 물론이었다. 소녀는 부끄러웠고, 괴로웠으며, 한편으로는.

그때 내 세계가 부서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얄팍한 껍질을 깼을 뿐이었고.”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허물어진 벽 너머 진짜 세계를 보게 된 것에. 분명히, 청년을 거치며 소녀의 세계는 확장되었다. 타자가 심은 사상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이국의 소년들과 얽혀, 세상의 그림자를 지워내고 있다. 소녀는 이 세상 곳곳에 폭력을 휘두르는 자와 그에 짓밟히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번영 뒤에 착취가 있다는 것도 이해한다. 이제, 다시는 새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새장에 들어가기에 소녀의 날개는 너무 커졌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구해줬다는 말은 네게 돌려야 할지도 모르지.”

잘못된 걸 버릴 마음이 있었으니, 바로 바뀔 수 있었던 거야. 보통은 그렇게 못 해.”

칭찬인가?”

그럴지도. 우리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는 겁쟁이니까.”

사야카와 똑같은 말을.”

그래서 네게 친절할 수 없었던 거다.”

청년의 목소리는 소녀를 동료라 부를 수 없다고 선언한 때만큼 침중했다. 다만 이번엔 그때처럼 마음을 닫아거는 게 아니라 내면을 내보이리란 것을, 소녀는 직감한다. 소녀가 그동안 덮어둔 것을 고백했듯, 청년도 홀로 삼켰던 무거운 이야기를 천천히 흘려보내는 것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너무 한정적이어서.”

정의를 찾아 뛰어드는 건 못 해. 기적을 만들어주는 것도 마찬가지. 그나마 내가 끌어안을 수 있는 건, 기지에 남은 몇 명뿐. 청년은 창백한 얼굴에 빈 웃음을 그리며 말을 잇는다.

너라면 잘 알겠지. 이게 전부 변명이란 걸. 이런 곳에서도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어. 타인을 구하려 애쓰는 사람도 보이고. 그런데도, 나는, 눈앞의 싸움에만 매달릴 뿐이야. 시티에선 제법 정의의 편인 척 했지만, 결국은.”

삶이 폐허가 된 남자는 황폐한 현실을 포장 없이 고백한다. 나는 너와 달라. 당장 쥔 것을 잃기 싫어서 빛을 선택하지 않을 사람이야.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쓰리다. 그런 것을 품고 살아서, 청년은 타자와 섞일 수 없었다. 내민 손을 잡기도 두려워했다.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고서 스스로 고독해졌다. 그러니 이 순간, 소녀는 그의 생각을 깨야 했다. 청년이 과거 저에게 했던 것처럼.

그러니 나는 네 싸움에 끌어들이기엔 부족한 사람이다?”

불쑥 끼어들자 청년의 눈이 둥그레졌다.

아니, 그 반대지. 나는 너를 끌어들이기에…….”

랜서즈 세레나를 만든 게 너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지?”

너를 제대로 감당해주지 못할 것이.”

내세우는 정의도 없고, 미래에의 계획도 없이. 기계처럼 싸울 뿐인 사람이 어떤 영향을 미치겠어? 청년의 말은 그답지 않게 무기력해서, 소녀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매일 앞장서 타자를 지키면서 그는 마치 스스로가 폐허의 잔재인 양 군다. 타인을 절망으로 물들이는 얼룩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소녀는 청년의 오른팔을 홱 잡아끌며 걸었다. 평소의 청년이라면 소녀의 손을 쉽게 떨쳐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무방비한 채 이끌린 바람에 청년은 한참이나 소녀에게 끌려가야만 했다. 놓아줘, 세레나. 어느 순간부터 청년이 그녀의 등에 말을 꽂았다. 혼자 걸을 수 있으니 놓아줘.

퍽이나 혼자서 하겠군.”

소녀가 빈정거림과 함께 청년을 놓아주었을 때, 그의 흰 손목엔 벌건 자국이 남아있었다.

겁쟁이란 말, 충분히 이해했어. 스스로는 살 이유를 만들지도 못하는 사람이니까.”

부러 강한 말을 던지며 소녀는 청년의 반응을 기다렸다. 도발에, 넘어가야만 했다. 무기력하게 받아들여선 안 되었다. 나는. 겨우 입을 뗀 청년이 무어라 말하려던 때 소녀는 한 번 더 그를 떠밀었다.

내 말을 부정하고 싶으면, 지금 만들라고. 미래에의 계획.”

어떻게?”

그건 쿠로사키 슌의 몫이지. 내가 책임질 것이 아니라.”

미래를 그리라고 해도 떠오르는 게 없는데.”

과거를 복구하는 건?”

저런 거 말이야. 소녀는 청년 너머 멀리 보이는 구조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온통 깨진 구조물을 중심으로, 여러 기구가 놓여있었다. 끔찍하게 무너진 탓에 원래의 쓰임은 알 수 없으나, 단지의 규모를 보면 폭격당하기 전까진 여러 사람을 수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저쪽에 있던 거, 뭐였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엔 어떤 곳이었는지 너는 기억하겠지. 이제는 잿빛의 잔해가 된 풍경에 청년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 유원지였던가.”

유원지?”

루리와 자주 갔던 곳인데. 꼴이 말이 아니군.”

그게 뭘 하는 곳이지?”

그야, 놀이기구가…….”

청년의 말은 거기서 끊어졌다. 소녀의 얼굴에 의문이 그려졌기 때문이리라. 짧은 침묵 끝에 청년은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카데미아엔 정말로 훈련 시설밖에 없었나?”

프로페서의 목적은 군대를 키워내는 것이었으니 쓸모없는 걸 두진 않았지.”

학교는? 아카데미아의 교육이 끝?”

아마도.”

덤덤할 수밖에 없는 것은 소녀의 세계가 정말로 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태어난 나라를 떠나 이국으로 향할 때마다 소녀는 자신이 모르는 것과 마주했다. 여러 공연이 올라오는 스타디움, 놀이 시설.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결투장이 아닌, 그저 즐거움을 얻기 위해 찾는 장소들 그런 것은 소녀의 세계에서 처음부터 잘려나가 있었다. 목적이 있는 것만 용납되는 세계이기에 그랬다.

청년의 세계는 그와 정반대였던 것 같다. S가 보여준 평화로웠던 때의 사진엔, 동화 같은 도시가 찍혀있었으니. 생존자의 증언으로 그려낸 이곳엔 모두의 행복을 위한 시설이 가득했으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청년은 아마, 소녀가 상상도 해본 적 없었던 것을 보고 듣고 경험했으리라. 그것이 얼마나 빛나는 것이었건, 소녀는 가져본 적도 겪어본 적도 없는 것을 부러워하진 않는다. 다만 신기할 뿐이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그는 전부 잃었다는 것이.

……그랬군.”

청년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살아와서 전장에 나서기 전부터 전사였구나. 나직한 중얼거림을 소녀는 분명히 들었다.

거기서 멈추진 않았어. 조금씩 다른 세계로 나가고 있으니까.”

일상을, 학습하는 건가.”

너무 늦게 배우는 것 같긴 하지만 분명히 달라지고 있지. 새로운 지식이 머리를 채우고, 평범함을 익히고…….”

자랑스러워해도 돼. 시작은 너를 만난 것부터였으니까. 소녀는 청년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네가 내 세계를 열어주었잖아. 청년이 그녀의 삶에 가져온 것을 생각하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청년은 소녀가 경험하지 못한 곳, 자신이 잃은 것에 시선을 두었다가, 자신의 다친 팔을 보았다가, 소녀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그의 입술이 열렸고.

세웠어. 미래에의 계획.”

어떤?”

무언가를 새로 이뤄야 한다고 생각해서 어려웠던 거야. 되돌리는 것도 가능했는데. 내게 미래를 그려낼 상상력이 없다면, 여기 사람들이 마땅히 되찾아야 할 것을 돌려줘야지.”

내가 살아온 평화, 일상. 추억을 쌓았던 장소. 띄엄띄엄 이야기하는 청년에게서 그림자는 비치지 않는다. 대신 소녀가 그동안 그에게서 읽어낸 적 없는 것이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 빛이 들게 하는 것. 금빛 눈에 열기를 드리우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싸움에 의미는 있어. 유토가 말한 것처럼, 미래를 구하는 거야.”

청년이 두른 것은 분명 희망이었다. 타인을 위로할 때조차 들먹인 적 없는 희망을, 청년은 스스로 걸쳤다. 소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껏 그 실마리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예전부터 네 싸움엔 의미가 있었어. 동료들을 지켜주었잖아.”

붕대를 감은 왼팔이, 소년을 지키다 입은 부상이 그 증거. 청년의 싸움은 생존자에겐 방패가 되었다. 생존자의 삶을 연장시킨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이전부터 미래를 구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청년은 이제야 자신의 미래까지 구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늦게나마 제 행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희망을 깨닫는 것으로.

제대로 지켜주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좋아. 앞으로는 정말 모두의 미래를 위해 싸울 테니. 그리고…….”

청년은 숨을 크게 삼키고, 말을 이었다. 그에게는 드물게도 들뜬 목소리로.

모두에는 너도 있어. 동료니까.”

이제 제대로 인정해주는구나.”

함께 싸움을 끝내고, 하트랜드에 일상을 되돌리고, 네가 몰랐던 평범한 것들을 가르쳐줘야지.”

유원지에도 가고?”

물론. 그때는 루리도 함께일 거야.”

내일이 없을지도 모를 전장에서, 둘은 미래를 이야기한다. 불확실한 시간을 그리고, 실행하지 못할지도 모를 계획을 떠들어댄다. 그것은 절망에서 도피하는 게 아니라 희망을 피우는 것임을, 두 사람은 알았다.

기대할게.”

따라서 기약 없는 약속에 대한 답은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소녀는 웃음 띤 목소리로 그가 건넨 희망을 받아주었다.

그들은 비극에 먹히지 않을 것이다. 싸움을 포기할 일도 없다. 폐허의 잿빛을 한 조각씩 걷어내며, 빛을 찾아낼 것이다. 침략군을 상대해야 하는 현실이 매일 둘을 짓누르겠지만, 그들은 전사로 만들어졌기에 거듭되는 전투를 버틸 수 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키다 보면, 언젠가는 분명히 모든 것이 끝난다. 아니, 그들이 모든 것을 끝낸다.

그리고 그때 둘은 같은 자리에서, 각자의 미래를 보고 있으리라.

소녀는 언젠간 틀어쥘 미래를 그리며, 기지로 걸음을 옮겼다. 전투의 무게를 나눌, 동료와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