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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지+레이] 어떤 몰락에 대한 변명

현소야 2020. 6. 14. 02:36

 

게임 회사의 젊은 사장은 어느 날 갑자기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 소식은 세상을 충격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그에게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종말이었기에. 사장의 삶은 신화에 가까웠다. 타고난 영민함과 갈고 닦은 수완은 아버지 대에 이미 주목받던 회사를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부와 명성을 움켜쥐고도 그에만 집중하지 않고, 창업주인 아버지가 벌이는 악행마저 막으려 했다. 아비가 소년병을 키워 주변국을 침략하자 그 역시 정예병을 결성해 맞서 싸운 것이다. 그 결과, 한 나라를 삼킬 뻔했던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무사히 돌아왔다. 스물도 되지 않은 남자가 이뤄낸 성과였다.

주변국의 전쟁을 막지 않았더라면 온 세상에 침략군이 밀려들었을 테니, 사장은 세상에 평화를 선물한 셈이 된다. 사장에게 미래를 빚진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정예병이 세상을 구한 전사였다면, 그는 전사를 키워내고 희망을 가져온 영웅이었다. 그렇게 영웅이 된 남자가 급작스레 죽음을 맞은 것이다. 타살의 흔적은 없다. 자살이라 쉽게 결론 내리기도 어려웠다. 체내에서 특정 약물이 치사량 이상으로 검출되었으나 중독성이 있는 약물은커녕 지극히 평범한 약이었다. 자살인지, 실수로 과다 복용한 것인지. 누구도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사장의 죽음에는 온갖 말이 돌았다. 실은 그가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할 치부를 숨기기 위해 자살했다는 사람이 있었다. 마약에 손을 대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타살 흔적이 없다는 경찰의 발표는 진실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이고 실제론 살해당했다는 말도 있었다.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리라고, 사장을 오래도록 모셔온 비서는 생각했다. 죽은 사장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비서는 사장의 죽음을 제대로 파헤치고 싶었다. 사장에 대해 묻는 기자를 적당히 떨쳐내고 온 비서는 사장이 저에게 남긴 단서가 있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나카지마.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나?]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친 것이, 죽기 전날 사장이 던진 물음이었다. 통 잠을 자지 못해 핼쑥한 얼굴에 쓸쓸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최근 내가 한 일은 전부, 사업적으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 자네가 보기에도 실패인가?]

[어떤 일의 성과가 제대로 나오기 전까진 판단을 신중하게 해야 하지요. 아직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어긋났어. 한 번 내 실패를 자각한 후론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어. 자네가 믿는 아카바 레이지는 이미 쇠했단 말이야.]

[사장님답지 않은 말입니다. 랜서즈와 함께 싸우고 돌아올 때처럼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시지요.]

간절함을 담아 꺼낸 말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장은 그대로 서류에 시선을 옮겼고 다음날 거짓말처럼 죽은 채 발견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사장은 무척 지친 눈치였다. 어떤 위기도 잘 넘어왔던 사장이라 이내 힘을 차릴 줄 알았으나, 결국 그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적당히 넘겨버렸던 실패라는 말이 새삼 비서를 괴롭혔다. 무엇이 그 완벽한 사장을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던가. 그의 삶에서 진정 실패라고 말할 것이 있었던가. 거기서 떠오른 것은 반년 전쯤에 죽은 남자였다.

전쟁 피해자로, 사장이 꾸린 정예병의 일원이기도 했던 그 청년을 사장은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선언했다. 회사에 두고서 그의 미래를 찾아주겠다는 것이 사장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사장의 품에 들어온 청년이었으나, 누구도 그의 구원을 기대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웠던 이들을 전장에서 잃고 돌아온 청년은 하루하루 말라갔으므로.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 내내 죽은 시간만 돌아보았다. 과거에 묶여 현재의 사람과는 관계를 맺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러다, 그 자신도 유물이 되고 말았다.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죽음을 택하는 것으로.

그 남자의 죽음은 생전 그가 취한 태도처럼 지독한 데가 있었다. 그의 주검은 회사 근처 스타디움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은 이방인인 그가 처음으로 이곳 사람들 앞에 선 장소이기도 했다. 과거, 대회에 참가했던 청년이 스타디움에서 펼친 무대는 사람의 이목을 끌어 그의 이름을 이국에 알렸다. 그것을 기념하는 죽음이라기엔 타이밍도 방식도 제법 악랄했다. 조사 결과 그는 스타디움에 숨어들어간 후, 객석에서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경기가 열릴 무대 쪽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된 죽음이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의 죽음으로 취소된 경기는, 전쟁이 끝난 후 그가 내내 외면했던 소년의 경기였으므로. 그의 동지가 되고 싶어 했으나 처참한 비극만을 안겨준 소년에게, 그는 소년의 무대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답한 것이다. 냉소인지 그 나름의 복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 즈음의 청년은 완전히 무력해져서 자신을 파괴하는 것 외엔 무엇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사장은 그 죽음을 퍽 불쾌해했다. 그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있었을 것이다. 비서가 추측하기에, 그 중 가장 깊었을 감정은 패배감. 청년은 전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장의 영역에서만 지냈다. 지원을 받으면서 자유롭게 나다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속 짐승처럼 회사 내부만 맴돌다가 죽었다.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죽을 때서야 화려하게 모든 것을 터트린 것이다. 얼마든 사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한 번도 사장에게 손을 뻗지 않고 말라가다가.

시신이 빠르게 수습되지 않은 탓에 비서는 망자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쓸쓸한 육신은 꼭 떨어져 죽은 새를 연상시켜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남자의 이름이 맹금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을 떠올리면 더더욱 찜찜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사장도 그런 감상에 사로잡혔을까. 망자가 선택한 죽음의 방식까지 들은 사장은 창밖을 바라보며 뜻 모를 말을 흘렸다.

[새도 추락해 자살할 수 있을까.]

괴상한 말의 의미를 파헤치려 노력하다, 비서는 문득 죽은 사람에게 사장이 부채감을 품고 있었음을 떠올려냈다. 그것은 아마 망자를 비유한 말이었으리라.

[괴로워지면 어떤 생물이든 스스로를 죽일 수 있겠지요.]

[지독하군.]

하지만 그 전에 누가 날개를 쥐어뜯었다면. 거기까지 말하고서 사장은 입을 닫았다. 그 뒤에 따라붙을 말을, 사장이 삼킨 말을 비서는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겠지. 사장의 실패를 요약하는 문장이었다. 실패라는 말은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전쟁마저 끝내고 돌아온 사장은, 살면서 무엇 하나 실패한 적 없는 사람은 청년만은 구하지 못했다. 제 또래의 청년을 빛으로 끌어내지 못해 그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망자의 주변인은 부고조차 전달받지 못해, 사장이 산 사람을 대표하여 그의 마지막을 지켜야 했다. 이방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죽음은 이 도시에서 큰 사건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장은 그 즈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청년의 죽음이, 처음으로 겪은 실패가 그를 천천히 무너뜨린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이어졌다. 사장은 덮어둔 과거를 파헤치다가, 침략자를 벌해야 한다고 소리치다가, 회사의 앞길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전까지 세상은 평화롭고 회사엔 흠이 없었는데, 사장은 자신이 어렵게 일궈낸 모든 것을 망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장이 죽기 전날 남긴 말처럼, 청년의 죽음 이후 그가 추진했던 일은 죄다 사업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은 이에게 홀리기라도 했는지.

진실을 이야기해줄 것은 이제, 하나밖에 없다. 비서는 주인 잃은 사장실에 들어서, 사장의 물건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찾아내야 할 것이 있었다. 사장이 죽기 직전까지, 강박적으로 무언가 써내려가던 수첩. 늦은 밤이 되면 사장이 슬그머니 꺼내던 수첩이 있었다. 의도치 않게 시선이 닿았을 때 사장이 바로 덮어버리는 것도 본 기억이 있다.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되는 듯 철저하게 숨기던 수첩에, 어쩌면 사장이 저만 아는 이야기를 써두었을지도 모른다. 사장이 왜 죽었는지, 그동안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일 수도 있다.

망자의 물건을 뒤지는 것은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으나 비서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 잘 정돈된 공간을 엉망으로 만들면서까지 그는 주인의 기록을 찾았다. 그렇게 사장실을 한참 헤집은 끝에 비서는 기억 속 수첩을 꺼낼 수 있었다. 자물쇠로 잠긴 서랍을 억지로 연 결과였다. 발견하자마자 거칠게 펼치려는데, 표지에 붙은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다. 사장의 필체로 적힌 문장은 간결했다.

<발견하면 내용을 읽지 않고 바로 파기할 것.>

사장이 그렇게 남겨놓은 이상, 펼쳐볼 수밖에 없다. 그 속에 정말로 사장의 내면이 기록되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비서는 죽은 이에게 소리 없이 용서를 구하고, 수첩을 펼쳤다. 처음 몇 페이지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일을 잘 마쳤다느니 출장이 있다느니 하는, 일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건조한 문장으로 기록된 것을 휙휙 넘기다, 비서는 저에게 익숙한 날짜에서 멈췄다.

청년이 죽은 날.

쿠로사키가 죽었다. 자살일 거라고 했다. 차라리 사고사이길 바랐다.

의외로 짤막한 기록이었으나, 제법 동요했던 듯 글씨가 평소와 다르게 잔뜩 흔들린 채였다. 그 후 며칠은 쭉 청년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그 중 비서에게 인상적이었던 건 청년의 장례를 치른 날의 기록. 드물게 길게 써내려간 페이지는 쓸쓸한 문장으로 가득했다.

쿠로사키의 장례를 치렀다. 하트랜드에서 전후복구 작업에 집중하고 있을 그의 동지들에게 연락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런 시신을 돌려주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엔 이유가 있을 것이며, 나는 그의 죽음까지 타인에게 내놓고 싶지 않았다.

……실은 고민 끝에 디스크에서 연락처를 찾다가 내게 쿠로사키 슌과 관련된 연락처는 하나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와의 연결고리란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는지 뒤늦게 알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끝까지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내가 선물했던 것이 전부 포장도 뜯지 않고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 쿠로사키 슌의 삶에 나는 무엇을 남겼을까. 감상에 젖은 것인지, 잠깐 잠들었을 때 그의 꿈을 꾸었다. 그의 얼굴에 비치는 것은 해방감이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삶이야말로 그에겐 족쇄였고 죽음이 최고의 낙원인 듯했다. 한 번도 그를 구해준 적 없다는 것에 패배감이 들었을 때 그의 뒤에 선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레이.

왜 그 여자가 나타난 걸까. 쿠로사키에겐 누이에 가까운(쓰고 보니 우스운 말이다. 쿠로사키는 그녀가 나타나며 누이를 잃었다.) 존재이기에, 그를 구하는 체 하는 것인지.

너는 또 구하지 못했구나.

그 여자의 목소리는 나긋했다. 그래서 더 처참했다. 나는 인간의 무력함을 살피는 신 앞에 선 듯 했다. 그 여자는 양팔로 가만히 쿠로사키를 감싸고 있었는데, 일생 고통받은 성자를 안아주는 절대자 같았다. 내가 실패했다는 뜻인가? 묻자마자 답이 돌아왔다. 알고 있잖아, 레이지.

최선을 다했어. 나도 모르게 변명하고 있었다.

정말로?

거기서 불쾌해져서 꿈을 끊고 깨어났다. 식은땀을 흘렸는지 온몸이 축축했다.

예상이 들어맞았다. 사장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청년의 죽음으로 크게 흔들렸던 것이다. 죄책감에 시달린 끝에 죽은 청년의 꿈을 꿨고, 정예병이 전멸할 위기에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한 구원자마저 만났다. 구원자는 이미 과거의 사람이니, 어떠한 신비로 사장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장이 빚어낸 환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면 사장이 자애로운 구원자에게까지 그런 처참한 말을 들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굳이 찾자면 청년이 절망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분명 사장은 청년의 죽음을 막지 못했으나, 사장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그 남자는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원자도 청년의 불행을 끊어주진 않았다. 그러니 사장도 그렇게까지 자책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불행한 청년을 애도하고, 그와 같은 이가 나오지 않도록 피해자 지원에 더 힘을 쏟았으면 충분했는데. 좀 더 일찍 사장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비서는 페이지를 넘겼다.

꿈을 꿨다. 레이가 나타난다. 쿠로사키의 어깨에 손을 얹은 모습으로. 쿠로사키는 그녀의 손길에 인형처럼 얌전하다.

죽은 사람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불쾌하다.

눈을 감으려고 했더니 레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이 사람은 죽을 때까지 행복을 몰랐어. 하트랜드가 전후복구 작업을 하는 동안 아카데미아는 모든 죄로부터 도망쳤지. 이게 네가 바라던 것이었을까?

전날 꿈에서 레이를 만났다.

쿠로사키가 레이를 불러내는 근원인가 싶어 오늘은 쿠로사키의 물건을 전부 치웠다.

짐작한 대로 얼마간 계속 청년의 이야기가 나왔다. 다만, 죄책감의 투영으로 나타났을 구원자의 이야기가 한 번도 빠지지 않는 것이 기묘했다. 청년이 죽어 가책을 떨칠 수 없게 된 바람에 구원자가 계속 나타났다고 하기엔 이야기의 중심이 점점 구원자로 옮겨가고 있었다.

쿠로사키는 나타나지 않지만 레이는 이번에도 꿈에 찾아왔다.

이제 꿈을 끊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는 끝까지 레이에 묶여있어야 한다.

레이는 폐허에 서 있다. 하트랜드일 것이다. 하트랜드 땅을 밟은 적은 없지만 쿠로사키의 고향 사람들이 보내준 사진 속 하트랜드는 딱 그런 풍경이다. 하필 그곳을 배경으로 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을 바라? 레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알고 있잖니, 레이지. 레이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 모습에 힘이 풀린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안다면, 내 처참한 실패를 끊어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당신은 구원자이니 나도 구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밑부분이 찢겨 있다. 찢겨나간 면이 깔끔한 것으로 보아 일부러 잘라낸 것 같다.)

……앞장의 이야기는 잠에서 깨자마자 쓴 것이다. 레이의 꿈이 계속되는 이상,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아무리 잠이 깬 직후였다지만 죄다 현재형으로 쓴 게 소름끼친다.

어느 날부터는 그렇게 구원자의 이야기만 나왔다. 처음 사장을 죄책감에 몰아넣었을 청년이 퇴장했음에도, 사장은 구원자의 형상으로 나타난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도리어 점점 그에 매이는 것 같아 보였다. 일기를 쓰듯 날짜를 기록해둔 덕분에, 비서는 그 즈음 사장이 보이던 행동을 머릿속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사장이 불면에 시달리게 된 것이 아마 그 즈음부터였을 것이다. 며칠씩이나 안색이 나쁜 사장에게 조심스레 몸상태를 물었더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수면제를 처방받으시는 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카지마. 지금 나는 잠을 들여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잠이 들 때마다 제대로 쉬지 못하는 거다. 수면제를 쓰면 더 힘들겠지.]

[악몽이라도?]

[어쩌면.]

그렇게 답한 사장은 정말 피로한 듯 한쪽 눈꺼풀을 잠깐 손으로 덮었다.

[……상담을, 받아보고 싶은데. 괜찮은 의사가 있나?]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LC 산하 병원엔 우수한 의사가 많으니 불면쯤은.]

[나카지마.]

[?]

[하나 더. 요즘 들어 아카데미아 처분이 영 마음에 걸려. 그 때문에 더 악몽에 시달리는 것 같기도 해. 간부들만이라도 어떻게 추적해 처벌할 방법이 없나? 처음엔 재판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시 논의한다고 하면…….]

[아카데미아 해체 후 그 연구원들이 여러 프로젝트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걸 아시겠지요. 다시 그들을 처리하려 하면 아마 큰 반발이 일 겁니다.]

모든 것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덧붙인 말에 사장은 미지근한 웃음을 걸쳤다. 그래, 자네마저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흘러나온 목소리는 쓸쓸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렇게 덮어버린다면, 나는 끝까지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그것은 예언이 되었다. 사장은 죽기 직전까지 불면을 떨쳐내지 못했다.

사장실의 책상에 레이가 걸터앉아 있다. 꿈이 아니다.

이제 그 여자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런데도 목소리를 듣고 있다. 이게 네가 바라던 성공이었어?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바랐던 것은 모든 것을 바로잡는 이야기였다. 전쟁을 끝내고 침략자는 죗값을 치르며, 전쟁에 찢긴 피해자는 일상을 돌려받는 것. 동화 같은 발상이라 해도 좋았다.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상을 꿈꾸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내가 이상을 이뤄냈던가? 엑시즈의 전쟁은 끝났으나, 내 공은 아니었다. 그것조차도 이미 필요한 것을 전부 긁어낸 아카데미아에서 싸움을 멈춰준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트랜드엔 아직 전쟁의 흔적이 선명한데, 침략자인 아카데미아는 가벼운 조사만 받고 전부 풀려났다. 뿔뿔이 흩어진 그들을 다시 모을 방법은 없다. 아카바 레오는 기술자로서 봉사하겠다는 말로 중형을 피했다. 쿠로사키 슌은 죽었다. 그의 날개를 쥐어뜯은 것이 본인인지 나인지 알 수 없다. 랜서즈는 돌아왔는데 함께 떠났던 세레나는 이제 만날 수 없다.

레이라는……(잉크가 번져 있다.)이게 그 아이에게 안겨줘야 할 결말이었던가?

나는 무엇을 했지?

여기까지 읽으면 확신할 수밖에 없다. 사장을 괴롭혀온 악몽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처음엔 청년에게 기대어 나타났던 구원자는 점점 사장의 꿈을 물들이다 결국 그의 현실에까지 번졌다. 사장은 올바른 결말을 상징하는 구원자와 마주치는 내내 실패를 생각해야만 했으리라. 청년의 죽음이란 실패의 대표적인 예였을 뿐. 그것만이 사장의 실패였던 것은 아니다. 사장이 십대 초반의 소년이었을 때부터 그를 지켜봐온 비서라면 안다. 사장이 본디 이상주의자에 가까운 인간임을.

그렇기에 실은, 적당히 봉합된 결말을 견디지 못했으리란 것을.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 사장과 그 정예병이 모두를 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청년은 비극에 질식해 죽었고 청년의 주변인은 돌아오지 못했다. 몇몇은 자신의 삶을 잃었고 몇몇은 아예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불행에 기여한 이들은 세상 곳곳에 숨어들어 사장이 가져온 평화를 함께 누리고 있다. 그 사실을 제대로 마주한 때, 사장이 견뎌낼 수 있었을까. 비서는 타협이야말로 사장의 목을 죄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누구의 죄도 묻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기로 한 합의는 사장에게 패배감만을 안겨주었으리라고.

불면에 대해 고백한 지 오래지 않아 사장은 의사를 만났으나, 상담은 그리 성공적이었던 것 같지 않다. 처방받은 약을 고작 몇 번 먹고는 치워버린 사장이었다. 불면의 근원이 현실에까지 튀어버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불면은 계속되었고, 사장은 간간이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다. 대개는 침략자의 처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을 지적하는 상황에서였다. 사장은 전후 처리에 대해 논할 수 있을 자리에선 꼭 침략자의 처분을 문제 삼았다.

[한 차원 단위의 사람을 몰살시키려 했던 무리를 내버려둔다, . 대단한 평화주의자로군.]

핏기 없는 얼굴로 냉소하는 사장이 언뜻 죽은 청년의 망령에라도 씐 것 같다고 수군거리는 이도 있었다. 물론, 침략자의 주장에 동조할 수 있는 이는 없었으므로 누구도 드러나게 그의 주장을 엎지 않았다.

그러나 사장은 목적을 이뤄내지는 못했다. 전쟁이란 재앙을 끝낸 때부터, 모두가 전쟁이란 사건을 입에 올리기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다소의 얼룩을 외면해서라도 침략이라는 처참한 폭력을 잊고 싶었던 것이리라. 어떤 회의에서도 사장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침략자는 온 세상에 흩어져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아마 그런 쓰린 현실이 사장을 더욱 망가뜨렸으리라고, 비서는 생각한다. 이어진 기록에서 구원자의 환상이 옅어지기는커녕 사장의 삶을 야금야금 갉아먹기만 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정기적으로 해왔던 히이라기 유즈와의 상담을 그만두기로 했다. 의논은 없었다. 일방적으로 정해 통보했을 뿐. 히이라기 유즈는 어색한 웃음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래. 우리가 매번 만나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그동안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그 얼굴을 보면 레이가 생각날 것이 두려워서였다. 레이는 내 일상을 삼키고 있다. 레이나, 그 여자를 닮은 얼굴을 볼 때마다 내가 구하지 못한 것들이 떠오른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변명일 뿐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실패했다. 차원전쟁에 얽힌 사람이라면 전부 아는 사실이리라.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 사장이 제 관리대상인 한 소녀와 더는 직접적으로 마주하기 않기로 한 일. 소녀는 전쟁에 휩쓸렸다 기적적으로 돌아온 자. 청년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침략자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었다. 때문에 사장은 상담 명목으로 소녀를 만나 주기적으로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한 것을 지원해왔다. 바쁜 시기에도 빠트리지 않았던 만남이 생략된 것은 사장이 죽기 서너 달 전부터였다. 아무래도 나를 만나는 건, 히이라기 유즈에게 껄끄럽겠지. 이유를 물은 비서에게 사장은 그 정도로 답할 뿐이었다.

그 또한 사장이 무너지고 있었던 증거임을 비서는 뒤늦게 알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장이 망가지고 있었던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완벽한 인간이었고 반년은 그의 이상을 의심하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바꿔 말하면, 사장은 반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착실하게 붕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성은 쇠하지 않았어도 내면은 나날이 황폐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쥘 것 같은 남자가 패배감에 사로잡혀 절망했다.

견딜 수 없게 되어서, 내 길을 파괴하기로 했다.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쌓은 것을 전부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레오 코퍼레이션과 LDS……(잉크로 지운 흔적)까지여도 좋다.

아니, 회사에 남은 것이 정말로 내가쌓은 것이었던가? 아카바 레오와 어머니가 일궈낸 것 아니었던가? 나는 아들로서, 혹은 2대 사장으로서 윗대의 유물을 망가뜨릴 뿐이다.

절망의 극단은 대개 자기파괴로 향한다. 그런 점에서 사장은 점점, 죽은 청년을 닮아갔던 것 같다. 청년처럼 특정 이야기, 침략자의 제대로 된처분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다 그것을 이뤄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가혹해진 것이다. 사장이 자신이 쥔 것을 무너뜨리겠다고 선언한 시점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추진하기 시작한 때와 딱 겹쳤다. 수완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사장이 우연히 오판을 거듭한 게 아니라, 얼핏 봐도 실패할 일만 골라 뛰어든 것이리라.

스스로 발밑을 파기 위하여. 실패한 자신을 그렇게라도 벌하기 위해.

비서는 점점 페이지를 넘기기 두려워졌다. 사장이 남긴 것, 가장 솔직한 면이 절망으로 가득하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확인해야만 했다. 사장의 죽음은, 그의 내면을 전부 봐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므로. 망설이다가 페이지를 넘겨 확인한 이야기는 예상대로 처참했다. 날짜를 살피면 사장이 죽기 한 달 전쯤부터의 기록이었다. 구원자의 이야기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회사를 망칠 길은 제법 구체적으로 적혀있었다. 그 모든 것은 사장이 죽기 전까지 행한 일이었다.

그 시기에 비서는 사장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이들을 여럿 만났다. 사장님의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어요.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때는 상대의 말을 적당히 끊거나 불손함을 꾸짖었으나, 이제 비서는 안다. 몇몇 사람들이 실망했던 모습조차 사장이 의도한 것이었고, 사장의 판단력은 쇠하기는커녕 너무도 잘 벼려져 있었음을. 그랬기에 자신의 붕괴를 하나하나 기록하며 처참한 계획을 문제없이 실행했음을.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아카바 레이지에 대한 실망을 느낀다. 이제 아카바 레이지는 누구의 기대도 충족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정직한 결말이다. 살면서 이렇게 흥분된 적은, 사카키 유우야의……(이후 네다섯 어절쯤 지워져 있다. 펜으로 그어 확인할 수 없다.)이후 처음인 듯하다.

죽기 며칠 전의 기록은 무서우리만큼 간결했다. 너무 깊은 절망엔 호소도 비명도 따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음 페이지에 무엇이 적혀있을지 대강 짐작이 가서 비서는 숨을 크게 삼켰다. 사장은 아마도, 마지막으로 무너뜨릴 것을 미리 정해놓고 있었으리라. 그만이 망가뜨릴 수 있을 것. 부숴버리면 모두를 충격에 빠트릴 수 있을 것. 그리고 어쩌면, 절망에 빠진 후 사장이 가장 혐오했을 것.

음울한 결말을 상상하고서, 비서는 페이지를 넘겼다.

전부 무너졌다. 남은 건 하나.

나를 망가뜨릴 것이다.

예상을 저버리지 않은 문장을, 비서는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그것이 마지막 기록이었다. 동시에, 사장이 죽은 날짜가 적힌 페이지이기도 했다. 비서는 처참한 기록이 담긴 수첩을 그대로 덮었다. 이제야, 그의 죽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여기에 적힌 문장이 전부 그의 죽음에 대한 변명이었으니.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대로 세상에 내보낼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천재 사장이 무엇에 홀려 죽음에 뛰어들었는지, 어떻게죽었는지. 제대로 이야기하면 세상은 그의 죽음을 더럽힐 것이다. 그의 삶마저 멋대로 왜곡할지도 모른다. 젊은 주인에 대한 마지막 존경심으로, 비서는 자신이 알아낸 모든 것을 그저 삼키기로 했다.

사장은 모든 것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설계된 종말을 누군가 파헤치도록 둘 리 없다. 어차피 사인을 명확하게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적당히 이야기를 만들면 그만이다. 쇼크 정도면 적당하다.

사장은 원인불명의 쇼크로 불행히 세상을 뜬 천재로 기억될 것이다. 죽기 전 짧은 기간, 스스로의 업적에 얼룩을 남긴 기이한 행동들은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는 미스터리가 되리라. 절망에 빠진 끝에 모든 성과를 일부러 망가뜨리고 마지막엔 자신마저 파괴했다는 건 어디에도 퍼지면 안 된다. 기억조차 지워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사장의 죽음에 얽힌 모든 것을 잊기로 결심하고, 비서는 불길에 수첩을 던졌다. 그만이 알았던 이야기는 그렇게 재가 되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