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슌] 환상도시
화려한 색채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 미래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둠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형형색색의 불빛이 도시를 비추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고도로 발전된 문명의 흔적. 청년이 선 곳은 그렇게, 모두가 그릴 법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하트랜드라는 이름조차 동화 속 이상향 같다. 하나 희한한 점이 있다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한두 명의 목소리는 들릴 만도 한데, 세상은 지독하리만큼 고요하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의 이유를, ‘유일한 주민’인 청년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다. 그러나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사람을 찾으려 드는 일도 없다. 그런다고 달라질 리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청년은 모든 것을 천천히, 눈에 담는다. 높게 솟은 건물들도, 잘 닦인 도로도. 아이의 웃음소리가 언제라도 들려올 것만 같은 곳을, 청년은 홀로 간직하고 있다.
“여기 있었네.”
고요를 깬 목소리는 나긋했다. 짐작 가는 상대였기에 청년은 돌아보지 않는다. 도시의 주민은 청년뿐이지만,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문자가 한 명 있었다. 청년이 그를 제대로 상대하지 않을 뿐이다. 꾸준히 나타나는 방문자가, 제 또래의 남자가 껄끄럽다는 것이 이유.
“어때, 하트랜드는 마음에 들어?”
어느새 어깨에 손이 올려져 있었다. 친구라도 되는 듯 멋대로 접촉하는 것이 불쾌하다. 상대가 기대하는 건 자신의 반응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청년은 그 손을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돌아보면서, 청년은 호감형의 얼굴과 마주했다. 지금껏 몇 번 스쳐가긴 했으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태양빛의 머리카락과 서글서글한 눈, 화사한 옷까지. 빛나는 도시에 어울리는 화려한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말끔했다. 사람이 없어서 어떤 소란도 없는 이 도시처럼. 부자연스러운 완벽에 청년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 사람도, 자신이 선 도시도 누군가 빚어낸 환상처럼 느껴졌다.
“슌.”
상대가 이미 제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와 처음 만난 때부터 청년은 이름을 불렸다. 고향인 이곳 사람들도 아닌, 마주친 적 없는 이방인이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게 청년의 이름을 꺼냈다. 같이 걸어도 괜찮겠지? 덧붙여진 말에 바로 그에게서 멀어졌던 것을 기억한다.
“그쪽이 없다면 완벽할 텐데.”
지금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청년은 그를 삶에 끼워 넣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냉랭하게 선을 긋는 말에도 상대는 싱글거리며 청년의 곁에 선다.
“쌀쌀맞기도 해라. 그런 점은 참 일관적이라니까.”
“왜 자꾸 찾아오는 거지?”
“하트랜드를 너와 함께 보고 싶어서.”
“내 고향을?”
“하트랜드는 내겐 언제나 머물고 싶은 곳이기도 했지. 잠깐 스친 도시였지만, 내가 자란 곳보다 정이 깊었던 곳이야. 그러니 다시 만든 것 아니겠어.”
하트랜드를. 속삭임에 청년의 시선은 방문자 너머, 반짝이는 도시 풍경에 꽂힌다.
이곳에서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를, 청년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조금도 바뀌지 않는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눈치챌 수밖에 없다. 이곳은 이미 살아있는 세계가 아님을. 누가 억지로 뜯어낸 듯 군데군데 빈 기억 속에서도 하나 선명한 것이 있었다. 잿빛으로 무너지는 고향. 제복을 입은 군대가 꾸역꾸역 밀려들고, 오랜 시간 쌓은 문명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는 절망적인 날. 청년이 사랑하는 세계는 이미 짓밟히고 망가져, 죽음을 맞았다.
지금 청년이 선 고향은 모든 것이 무너지기 전, 아름다웠던 때를 재현해낸 것이리라. 제법 정교하긴 하나, 어차피 허상이었다. 실제였다면 아이가 뛰놀아야 했고, 사람들이 때때로 사소한 일로 다투다 화해해야 했으며, 시간이 흐르며 낡고 쇠하는 것도 있어야 했다. 변함없는 아름다움이란 환상이기에 가능한 비현실이다.
“놀라지 않네. 공들여 만들어서 깜빡 속을 줄 알았더니.”
“이렇게 말짱한 하트랜드가 있을 리 없으니까.”
“유감이야. 내 선물을 좋아해주길 바랐는데.”
“선물이라니. 너를 위해 만든 것 아니었나?”
“나는 말이야, 슌.”
이방인의 푸른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되돌리고 싶거든.”
명랑하게 튀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무엇을. 하고 묻는 대신 청년은 건조하게 받아쳤다.
“죄를 지었군.”
부정은 없었다. 쓸쓸한 웃음만 걸칠 뿐이다. 청년은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전 그가 이곳에서 무엇을 했을지 막연히 상상한다. 여행자처럼 도시의 구석구석을 살폈을까. 사람들과 어울렸을까. 그의 화려한 옷차림은 언뜻 광대를 연상시키는데, 혹 공연이라도 열었던 것일까. 전부, 무의미한 생각이었다. 무엇을 했건 결국 그는 ‘진짜 목적’이 떳떳하지 못해 어느 날 자취를 감춘, 도망자였을 테니까.
“내가 스쳐간 후 하트랜드는 폐허가 되었어.”
약간의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은 역시나 미지근했다. 결백하다는 주장도,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고백도 나오지 않는다.
“그 두 개의 사건에 상관관계는 없고?”
“마음대로 생각해.”
“그래서 이제 자기 위안이라도 하고 싶어?”
“정말, 속일 수가 없다니까.”
“어디에도 없을 평화로운 하트랜드를 만든 것도, 하트랜드의 생존자인 내가 여기서 지내게 하면서 계속 지켜본 것도 네 식의 속죄인가?”
가죽장갑을 낀 손이 청년의 눈앞에 내밀어진다. 상대가 쥔 것은 카드 몇 장.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카드는 새로 바뀌어 날아오르고.
“그래. 내 최선의 속죄는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거야.”
자신이 펼친 마술만큼이나 환상 같은 말을, 이방인은 흘린다.
“그래서 모든 걸 준비했지. 너를 구해와,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는 것부터 시작했어. 그 다음엔 너의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설계했고. 마지막은.”
“하트랜드를 만들고 나를 그 안에 밀어 넣기.”
“정답!”
이방인은 과장되게 손뼉을 쳤다.
“하지만 고민은 있었어. 하트랜드를 만들고 보니,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네가 외로워 미칠 것이 걱정됐지. 언제까지나 친절한 사람이,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그에 적합한 사람은, 짜잔! 여기 선 데니스 맥필드고.”
“그래서 스스로 나섰나.”
“자연스레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게 무리라면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마음을 얻는 게 좋을 것 같았어. 계속 다가가도 기회가 생기기는커녕 의심만 사는 것 같아서, 이번에 고백하게 됐지.”
“무엇을, 바라?”
무엇을 기대하고 내 앞에 섰지? 청년은 처음으로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금빛 눈과 푸른 눈이 서로를 비추었다. 대비되는 색채만큼이나 마음에 담아둔 것도 다를 것이다. 이방인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지는 것은, 거절당하는 것을 미리 생각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목적에의 열망을 이기기 어렵다. 과연, 이방인은 천천히 입을 뗀다.
“네가 이곳에서 다시 행복해지는 것.”
“환상 속에서 눈을 감으란 뜻이군.”
“환상이라도 네가 사랑하던 것 아냐?”
청년의 반박을 막으려는 듯 이방인은 말을 계속 붙여간다. 하트랜드가, 있잖아. 가죽장갑을 낀 손이 청년의 뺨에 가까워진다. 네 고향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잖아. 목소리가 떨린다. 이제 가장 어려운 말을 꺼내야 하기 때문이리라.
“내가 너의 유일한 이해자가 되어줄 텐데?”
뺨을 쓸어내리는 손을 청년은 빠르게 떼어냈다. 명백한 거절에 상대는 처연한 웃음을 걸친다.
“여기서 벗어나면 넌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어. 하트랜드가 폐허가 된 후로 넌 언제나 불행했지만, 사람들에게 연민조차 사지 못하고 비극의 그림자로 취급받곤 했지.”
“네가 내세울 건 그 사람들과는 다르단 사실뿐인가?”
“네 마음에 솔직해져. 한 번이라도 평범한 삶을 누리고 싶잖아.”
“네가 만들어낸 일상을?”
청년은 낄낄댔다. 상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확인하면서도.
“네 욕망은 간단해. 내가 네게 의지하길 바라는 거야. ‘네가’ 만든 세상에서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네가’ 준비한 행복을 찾는 거지.”
이방인이 침략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청년은 모른다. 아마 그 부분은 그가 청년의 기억에 손을 대며 일부러 지워냈으리라. 청년이 과거를 모른 채 그와 함께하도록. 그의 호의에 천천히 마음을 열고, 언젠간 그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도록. 모든 것을 고백하는 체 했으나 그는 청년에게 미움받을 것이라곤 어느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약아빠진 모습을 보인다면 청년으로선 그를 자신의 곁에 세울 수 없다.
이방인이 약속하는 행복조차 청년에게 맞춰진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판을 짜둔 채 청년을 설득하여 그 속에 끼워 넣으려 할 뿐이다. 청년을 구했다는 것도, ‘나쁜’ 기억을 없애려 한 것도, 청년의 고향을 굳이 만들어낸 것도 결국은 자기만족이었으리라. 회복을 위해 설계했다는 프로그램이 그의 입맛대로일 것은 뻔하다. 그는 구원자를 자처하지만, 성인이 아닌 이상 어떤 욕망도 없이 타인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는 없다. 그의 욕망이란 둘 중 하나.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은 것이거나 청년의 삶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고 싶은 것. 어느 쪽도 청년에겐 곱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행복해지면 그만이지 않아?”
나를 이용한다고 생각해. 은근한 목소리로 이방인은 말한다. 안정을 찾고 행복을 느낄 때 나를 떠나면 되잖아. 너는 나를 통해 행복해지고, 나는 속죄를 마쳐 홀가분해지는 거야. 띄엄띄엄 쌓이는 말은 언뜻 상냥하다. 인간을 꾀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어차피 우리가, 우리의 현실이 하트랜드가 무너지기 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한데.”
꿈에 빠지면 행복해질 수 있는데. 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청년은 제 또래의 남자에게서, 자꾸만 저를 찾던 사람에게서 체념을 읽는다.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그는 최대한 과거의 얼룩을 지우려 들었을까. 청년의 삶에서, 자신의 세상에서.
“한 번만, 너를 위해서라도 한 번만, 나를 믿고…….”
비극의 주인공처럼 그는 애원한다. 푸른 눈이 젖어드는 것을, 청년은 무심하게 감상한다.
“나여야 할 필요는 없잖아. 하트랜드의 생존자가 나뿐이진 않을 텐데.”
“너여야만 해.”
“그럼 ‘나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제대로 말해.”
“안 돼. 그걸 말하면 너는 다시는 나를 봐주지 않을걸.”
“비겁하긴.”
별달리 기대한 적도 없으나 역시 예상대로 얄팍한 인간이었다. 그것으로 청년은 상대에 대한 판단을 마친다. 이방인은 청년을 구할 수 있는 것처럼 굴었으나 사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구제의 열쇠를 쥔 것은 청년 쪽이었다. 알량한 애원에 무엇을 돌려주어야 할지는 뻔했다.
“내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
“물론.”
“방법을 알려주지. 우선, 지금 내가 선 하트랜드를 없애. 내게 ‘진짜’ 하트랜드를 돌려줄 게 아니라면. 다음으론 네가 저지른 일을 고백하고, 나 이외의 다른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와. 마지막으로는, 내 삶에서 사라지는 거다. 그러면 자연히 행복해질 거야.”
“나는 안 된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구나.”
“아니. 정말로 내 행복을 바란다면 얼마든 실천할 수 있는 일이지. 나는 네 방식대로 하지 않겠다고 했을 뿐인데.”
못 하겠다면, 그쪽이나 나나 서로를 포기할 수밖에. 청년은 그렇게 말하고서 돌아섰다. 오래 전 잿더미로 변한 도시를, 때문에 환상으로 쌓아야 했던 고향의 거리를 그는 천천히 걷는다. 열 걸음쯤 걸었을 때, 다급한 목소리가 등에 꽂혔다. 하트랜드의 끝으로 가면, 너는 불행해져. 불길한 예언에 청년은 웃었다.
“지금까진 여기서만 머물렀으니 몰랐겠지만, 밖으로 나가면 다시 평범한 세계야. 너를 받아줄 수 없는 곳 말이야.”
“어차피 행복했던 기억도 남아있지 않아.”
“한 번만 속아줘. 오늘 모른 체 넘어가면, 내일은 네가 믿을 수밖에 없는 이상향을 쌓을 거야. 네가 어릴 적 꿈꿨던 모든 게 준비된 세계에서, 모든 게 틀어지기 전처럼……,”
“허상에 숨는 놈은 상대 안 해. 내게 제대로 요구하려거든, 비겁하게 숨지 말고 제대로 말해.”
물론 그렇게 못 하겠지만. 빈정거린 청년은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처음부터 이곳에 자신뿐이었던 양. 몇 번, 이름이 불렸다. 몇 번은 애원이 꽂히기도 했다. 아직 기회가 있다는 말이 환청처럼 희미하게 울리기도 했으나 결국 따라붙는 발소리는 없었다. 따라와 붙잡을 만큼의 용기는 없는 것이리라. 혹은 청년에게 거절당할 것을 지레 겁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그렇게 비겁한 인물이라면 청년은 돌아봐줄 생각이 없었다.
환상으로 빚어낸 도시는 너무도 좁아, 청년은 오래지 않아 바깥에의 경계에 도달했다. 이 너머는, 청년이 머물렀으나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일 것이다. 그의 행복을 염원하는 이는커녕 침략의 피해자인 그를 지워내고 싶은 사람이 그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년은 바깥으로의 문을 열었다. 그동안 계속 아름다운 환상 속에서 머물렀으나 꿈은 누구도 구해주지 않음을, 청년은 너무도 잘 알았다. 거짓을 쌓고 환상을 치장해 구원을 이야기하던 사람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것만은 이방인에게 감사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