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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슌] 폐허의 증언

현소야 2020. 5. 10. 22:17

 

금빛 눈이 담아내는 세상은 아득히 멀다. 이 세상엔 없는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맹금의 이름을 가진 청년은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로 한 듯, 높은 곳에 올라가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무얼 보고 있냐는 질문이 날아들 때마다 청년은 침묵했지만, 청년을 전사로 부리는 사내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디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죽어버린 땅. 이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을, 이국의 도시. 청년은 폐허에서 왔다. 평화로운 도시는 침략군이 밀려들면서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고 했다. 이름을 이야기해봐야 아는 사람이라곤 사내뿐인 고향을 청년은 홀로 품고 있다.

기억으로만 남은 고향을 보는 청년에게, 사내는 소리 없이 다가섰다. 가만히 두면 몇 시간이고 미동도 없이 허공에만 시선을 둘 것이다. 고향을 생각하는 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으나, 청년이 언제까지나 표류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또 하늘을 보고 있군, 쿠로사키. 슬그머니 말을 걸자, 청년의 시선이 바로 사내에게로 향했다.

지휘관께서 무슨 일로.”

심드렁한 목소리에 사내는 웃었다.

바람이 찬데 들어갈까.”

괜찮은데.”

네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아무래도.”

옆에 앉아서 말해.”

잠깐 끌어온 시선은 다시 하늘로 향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폐허만을, 여기선 결코 닿을 수 없는 장소만을 그리는 것이다. 청년은 이곳 사람에게 지독하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희망을 찾아 고향을 떠난 지 제법 되었는데도, 여러 사람과 얽혔는데도 이국에서 만난 이들은 전부 타인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의 시간은 과거에 머물러, 현재의 것이라곤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모든 것을 잃은 청년이니, 그 지독한 경계를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사내라면 더욱 자격이 없다. 청년의 황폐함은 전쟁의 유산이고, 전쟁은 사내의 아비가 낳은 가장 끔찍한 자식이었으니. 사내는 제 성씨를 흘릴 때마다 청년의 눈에 걸리는 혐오를 안다. 아비를 적대하기에 사내는 청년의 지휘관이지만, 사내의 몸에 흐르는 피는 청년에겐 악마의 흔적이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할까.”

그럼에도 사내는 청년 곁에 앉아 부러 과거를 들먹인다. 그가 집중하는 것은 오로지 죽은 시간뿐임을 알기에. 과거에 붙들려갈 것만 같던 청년은 그제야 사내에게 제대로 관심을 보인다.

과거?”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는, 살아온 배경을 공유하는 거지. 내가 왜 아카바 레오를 적대하게 되었는지는 이전에 말해준 적 있을 터다. 그때 넌 네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레지스탕스 때의 이야기는, 어때?”

이제 와서 이야기 값을 받겠단 건가.”

싫다면 하지 않아도 돼.”

잠깐 관심을 끌기 위해 흘린 이야기였을 뿐이다. 마음을 닫아건 청년이 타자, 그것도 침략자의 아들에게 가장 괴로운 시간에 대해 털어놓을 이유란 없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사내가 이번에도 청년의 세계에 들어설 수 없을 거라고 체념한 때, 청년의 입술이 열렸다.

하트랜드는.”

그것은 청년이 홀로 삼키고 있던 고향의 이름이었다. 폐허만큼이나 텁텁한 목소리로, 청년은 느릿하게 말을 잇는다.

잿빛이야.”

눈꺼풀이 느리게 닫힌다. 청년은 이제 하늘을 보지 않는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시선을 두고서 보이지 않는 고향을 그리는 대신, 눈을 감고 기억에 잠기는 것이다. 잿빛이야. 청년은 그 말을 반복했다. 나는 중심지에 서 있어. 폭약 냄새가 나. 눈앞이 흐린데, 하트랜드에서 가장 높이 솟았던 탑이 보여서 위치만 대강 알겠어. 그 탑도 윗부분이 날아가서 이젠 절반쯤만 남았지만. 숨이 막히는데 걸음은 옮겨야 해. 발에 무언가 밟혀도 내려다보지 않아. 아마도 사람의 몸일 거야. 저번에, 이웃집 아저씨를 본 기억이 머리를 스쳐.

기묘하게도 청년의 말은 현재형이다. 과거를 이야기하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 과거에서 표류하고 있는 듯 군다. 폭격이 지나가면, 시신이 많아. 제대로 된 시신은 운이 좋은 거야. 아저씨를 바로 알아봤던 건 머리가 보였기 때문이거든. 조각난 팔과 다리가 굴러다녀도 누구의 것인지도 몰라. 내가 밟는 게 무엇인지 보고 싶지 않아. 여자애의 시신을 보면 미쳐버릴 것 같아. 내려다보지 마, 쿠로사키. 사내가 끼어들었다. 청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정면을 보고 걷는데, 눈앞이 온통 잿빛이야. 그래서 윗부분이 날아간 탑에, 제일 위쪽에 놓였던 구조물이 무슨 색이었는지를 생각해. 하트랜드란 이름에 맞게 하트 모양의 구조물이 있었는데, 무슨 색이었더라. 빨간색? 그래, 빨간색이었을지도 몰라. 나는 빨간색의 하트가 붙어있었던 탑 쪽으로 걸어가. 사내는 청년의 닫힌 눈꺼풀을 본다.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걸려있어, 꼭 꿈을 꾸는 것만 같다. 눈을 감고 몽롱하게 쏟아내는 말도 회상을 흘리는 것이라기보다 최면의 부산물처럼 느껴진다. 과거의 기억이 그의 무의식까지 깊게 파고든 탓이리라.

그는 왜 그 시간에 홀려있을까.

의문의 답을, 사내는 이미 알고 있다. 청년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은 지옥에서 벗어났고, 주변엔 함께 저항군으로 싸웠던 동지 대신 정예병 동료들이 있으나 침략자는 아직 그의 고향을 휩쓸고 있다. 고향에 대한 그의 기억도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갇힌 시간을 끝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탈자로서의 책임이다. 청년의 기억에 남은 것보다도 처참한 폐허로 돌아가, 침략자를 몰아내기 전까지. 전쟁에 삶이 묶인 청년의 시간은 흐를 수 없다.

사내는 청년의 입술을 닫고 싶어졌다. 혹은 자신의 귀를 막아, 청년이 담아내는 과거를 외면하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사내가 얌전한 청자로 남아있기로 한 건, 청년을 과거로 떨어트린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스스로를 병기처럼 취급하고 타인에게도 그렇게 비친 청년이 그나마 인간으로 느껴질 때가 지금이어서, 이기도 했다.

사내가 침묵하자, 청년은 텁텁한 목소리를 계속 흘렸다. 걸음을 옮겨. 총의 무게에 조금 안심해. 어쨌든 그건 아카데미아 놈들이나 내 쪽이나, 어느 쪽이든 숨을 끊어줄 수 있잖아. 내 쪽?’ 한 번쯤은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겨보는 걸 상상하는데……, 목적지야. 아카데미아 놈들이 점령했던 곳. 이런 곳은 놈들이 남기고 간 게 있을까 기대하게 되거든.

이런 곳이라면, 어쩌면. 청년이 침을 삼킨다. 뻔히 아는 과거 속에서도 청년은 명백히 긴장하고 있다. 무엇을 찾지, 쿠로사키? 포로. 포로라면, 네 동지들인가? 입술은 열려있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 끝에 청년은 뜻 모를 말을 흘린다. 처리했어. 루리 또래네. 누가? 아카데미아 놈이지. 하나 숨어있었어. 쏘고 보니 루리 또래야. 짜증나게. 기분 나빠서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포로를 찾으러 왔는데, 전부 쓰러져 있군. 여자애가 있어. 여자애의 시신을 보면 미칠 것 같은데. 속이 울렁거려. 하필 검은 머리카락이야. 시신을 뒤집고 싶지 않아. 이 애는. 청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돼, 쿠로사키.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의 청년이 무엇을 찾는지, 사내는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청년의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 전장에서 잃고 아직도 찾지 못한,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존재. 그건 네가 찾는 사람이 아냐. 달래려 꺼낸 말을 들었을까. 긴장으로 거칠어진 청년의 숨소리가 차차 안정을 찾았다. 위험하다 싶으면 청년을 현실로 끌어올 참으로 사내가 속으로 60을 세었을 때.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청년은 말을 이었다. , 귀걸이를 안 했군. 머리도 짧아. 루리가 아니구나.

사내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청년이 이 세상에 섞여들지 못하는 건 누구도 그의 심연을 이해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고. 다른 전사들 앞에선 청년의 이해자인 척 굴긴 하지만, 사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청년에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 그의 삶에 조금 더 관여할 뿐. 청년이 눈과 귀에 담은 세계를, 사내는 제대로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청년의 폐허는 너무도 처참하다.

그런 세계를 이해하려 파고들다 보면 청년의 과거를, 가둬둔 시간을 터트려 그를 과거에 익사시킬지도 모른다. 하지 못하는 일에 도전하기보다는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 낫다. 성공만을 겪어온 사내는 타인의 심연에 뛰어들어줄 수는 없지만, 빛을 비춰줄 수는 있다. 루리가, 아니구나. 젖어든 목소리로 반복하는 청년에게, 사내는 슬그머니 말을 건다. 이제 바깥으로 나와야지, 쿠로사키. 동생이 죽지 않았단 걸 확인했잖아.

바깥으로…….”

그래. 원군이 오기로 했으니 기지로 돌아가는 거야.”

누가 레지스탕스를 위해 싸워줘?”

불신 섞인 목소리에 사내는 간결하게 답한다.

랜서즈.”

아카데미아를 막고 전쟁을 끝내기로, 약속했잖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건, 사내가 흘린 이름이 바로 그가 결성한 정예병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정예병을 이끌고 아비에 맞선다는 것은, 아비가 키워낸 침략군을 쓰러트린다는 것. 세상에서 전쟁을 몰아내고, 청년 같은 이들에게 평화를 돌려주겠다는 것. 사내와 그의 전사들이 언젠가 청년의 고향으로 향하는 건 이미 결정된 일이다. 그곳에서 외롭게 싸우는 저항군은, 랜서즈와 힘을 합치게 될 것이다.

랜서즈. 단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청년은 사내의 말을 따라했다. 과거만을 바라보던 남자는 현재의 이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만족해 사내는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래, 랜서즈. 곧 하트랜드로 진입할 거야. 레지스탕스를 도울 거고. , 쿠로사키. 지금쯤은 기지로 가고 있겠지.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때, 닫혀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청년의 금빛 눈은 사내를 담아내더니, 이내 씁쓸한 감정을 비추었다. 단정한 얼굴에도 미지근한 웃음이 걸린다. 그것은 기쁨이나 설렘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얕은 수를 못 본 체 해주는 어른의 포장에 가까웠다.

걸려들 뻔했군.”

의미를 모르겠어, 쿠로사키.”

덕분에 그쪽이 무엇을 꿈꾸는지는 알게 되었지만. 지휘관께선 의외로 순진한데.”

내가 꿈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나?”

허튼 생각 하지 마. 그쪽의 역할은 헛된 희망을 불어넣는 게 아니라, 전사들을 제대로 지휘해 승리하는 거니까.”

현실을 일깨워주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사내는 저와 비슷한 나이의 청년에게서, 불행이 쌓은 냉정함을 읽는다. 청년이 아무 일도 없었던 체 일어나 짐을 챙기는 것을 보면서도 사내는 멍하니 자리에 묶여있었다.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상대가 자신의 수를 뻔히 눈치챘다는 것에 순간 힘이 쭉 빠진 탓이다. 청년은 본디 황폐한 인간이었으나 사내는 실패가 낯선 사람이었으므로. 지휘관에게서 돌아선 청년은 먼저 자리를 뜨면서 무심하게 말을 흘렸다.

오늘은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야겠어. 그러면 아카바 레이지의꿈에서 깨기 전에 잠들 수 있겠지.”

?”

속아주는 건 이번뿐이야. 난 다른 놈들처럼 희망에 매여 살 수 없으니까.”

의미심장한 말에, 사내는 청년이 눈을 뜨기 직전 본 풍경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현재진행형의 과거에, 사내가 속삭인 현재의 빛이 잠깐 끼어든 것이 분명했다. 아직 청년이 동지로 인정하지 않은 정예병이 그의 시야에 들어오고, 어쩌면 세상의 잿빛을 걷어주었을지도 모른다. 꿈에서 깨기 전에 잠들겠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청년은 적어도 하룻밤 동안엔 사내가 그려낸 꿈에 빠져있을 수 있으리라. 흩어지지 않게 꽉 틀어쥐고, 그대로 의식을 꺼트려, 잠깐은 희망에 취하는 것이다. 사내는 빠르게 떠나는 청년에게 무어라 답하는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청년의 폐허는 타인이 끌어안기엔 너무도 깊었으나, 청년이란 인간 자체를 삼키진 못했다. 전장에 뛰어들며 스스로를 병기로 취급해온 청년이 때로는 희망에 속아주고 때로는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그 증거. 청년이 사내를 떠나지 않는 이상, 사내는 언젠가 청년의 전쟁을 끝내게 된다. 전쟁과 함께 탄생한 청년의 폐허는 종전과 함께 조금씩 사그라지리라. 거기까지 생각한 사내는 먼 하늘에 시선을 얹었다. 청년이 폐허를 그리던 곳에, 사내는 화려한 미래도시의 풍경을 그려본다. 사내가 자신의 전사에게 돌려주기로 약속한, 과거의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