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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지+유야] 자라지 못하는 아이

현소야 2020. 5. 5. 21:05

 

사내는 팔짱을 낀 채 화면 속 영상을 감상하고 있었다. 일대기 영화를 틀고 빨리 감기 버튼이라도 누른 듯, 한 소년이 성장하는 과정이 눈앞에 휙휙 펼쳐진다. 포대기에 싸인 아기는 조금씩 자라 걸음마를 하더니, 부모와 함께 걷다가, 어느 순간엔 친구와 달려가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영상 속 아기는 열 살 남짓의 소년으로 자라났다. 여기까지는 사내가 수없이 보아온 장면이었다. 문제는, 다음 이야기가 있음에도 영상이 언제나 그 부분에서 멈춰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아기 때부터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다, 소년이 열 살쯤 먹었을 때 또다시 되돌아간다.

원래 영상이 담아내야 할 것은 열네 살까지 소년이 성장하는 모습. 며칠간 영상을 틀어놓고 살펴도 사내는 열네 살은커녕 열두 살의 소년도 만나지 못했다. 정말로 영화의 일부이기라도 했다면 차라리 나았으련만, 사내가 집요하게 재생하는 영상은 사실 사람의 기억이었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소년이 기억의 주인공. 기억 열람 기술은 열네 살의 소년에게서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할 삶의 기록을 끌어와 영상으로 출력하고 있었다. 영상이 매번 열 살 무렵에서 멈춘다는 것은, 소년의 기억이 거기까지만 담아낸다는 뜻. 소년을 보호 중인 사내로선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원인을 알아야 고칠 텐데, 본인에게 직접 물을 수도 없다. 소년은 며칠째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으므로. 사내의 시선은 화면 너머 침대로, 경직된 자세로 누운 소년에게로 향했다. 쓰러진 후 쉽게 깨어나지 못하기에 몸에 이상이 있는지 살폈지만 다행히 어디에도 문제는 없었다. 위험한 증상으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이라기보다 오래 잠든 것에 가깝다고 의사는 이야기했다.

[문제는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는 겁니다.]

걱정이 깃든 목소리에 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인은?]

[글쎄요, 무언가 큰 충격이 있었거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은 경우 이런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만.]

짐작 가는 일이 있습니까? 조심스러운 질문에 사내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쓰러지기 전, 소년은 너무도 괴로운 일을 겪었다. 기억도 없는 전생의 죄 때문에 악마로 몰려 정신이 한 차례 붕괴한 것이다. 끔찍한 모습으로 변이하기까지 했던 소년은 모두의 도움으로 겨우 원래 모습을 찾았지만, 그 후 쓰러져 어떤 자극에도 깨지 못했다. 스위치가 내려간 것처럼.

만일 소년이 를 잃었던 충격으로 계속 잠들어 있는 것이라면, 소년의 무의식에서 공포와 절망을 걷어내야만 했다. 소년을 어떻게 안정시킬지 고민하던 사내는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에 전해지는 기술을 떠올렸다. 기억을 열람하는 것. 타인의 기억을 영상 형태로 출력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정한 정보를 주입하거나 원래 있던 것을 잘라내는 것까지 가능해 기억 조작 기술로도 불리는 것이었다. 사내는 소년의 마음 속 그림자를 교묘하게 걷어낼 생각으로 기억 열람을 시도했지만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열 살 가량의 시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전까지의 기억만 되풀이하는 것.

처음엔 단순한 오류라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을, 똑같은 시점에서 똑같은 문제가 반복된다면 다른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소년을 잠에 묶어두는 것, 아마도 소년을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때의 기억일 가능성. 지금 열네 살인 소년이 몇 년 전부터 어떠한 사건으로 사람들과 거의 어울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내의 기억이 맞다면, 소년이 마을에서 고립되기 시작한 때와 소년의 기억이 멈추는 시점이 거의 맞물린다.

어쩌면 소년에겐 그때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 ‘가 송두리째 흔들린 때 다시 그 악몽에 떨어진 것인지. 그래서 무의식에선 그 나이로 머문 채, 더 성장하지 못하고 짓눌려 있는 것인지. 거기까지 생각한 사내는 마음이 무거워져 소년의 잠든 얼굴을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의식이 꺼진 때조차 안식을 찾지 못하는지, 앳된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지금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사내가 그때의 소년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소년이 어떻게 고립되었고, 무엇을 느꼈고, 때문에 어떤 식으로 자신을 달랬는지. 정보가 전혀 없었다. 사내가 소년의 삶에 들어선 것은 최근의 일이었으니.

아무래도 소년의 친구를 불러 제대로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때의 소년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소년의 곁에 있어준 몇 안 되는 이라면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증언을 토대로 소년의 무의식에 접근할 방법을 찾고, 그 다음엔 트라우마를 흐려야 한다. 불행의 시작을 지워내거나, 인위적으로 행복한 기억을 주입하는 것까지도 고려해야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바로 실행하기 위해 사내가 통신기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화면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영상 속 소년의 모습도 일그러졌으나, 마음이 급한 사내는 소년의 친구에게 통신을 시도할 뿐이었다.

통신기를 통해 연결음이 두어 번 들렸을까. 모든 것이 멈췄다. 공간은 침묵에 떨어지고 시야는 거짓말처럼 암흑에 잠겼다. 단순히 화면이 꺼진 것이 아니라 사내와 소년이 있던 공간 자체가 어둠에 먹힌 것이었다. 통신기 불빛에 의지해 전등을 켜려 했더니 통신기조차 먹통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제야 사내는 저를 방해하기라도 하려는 듯 줄줄이 일어난 일들을 제대로 인지했다. 영상이 강제로 꺼졌으니 소년의 기억에서 단서를 얻을 수 없다. 통신으로 소년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불가능하다. 움직여보려 하니 다리마저 뻣뻣하게 굳어져, 의자를 벗어날 수도 없다.

들여다보려 해선 안 된다는 건가 공간에 묶여버렸다는 공포나 거듭된 기현상에 대한 찜찜함보다 사내에게 선명했던 것은, 소년의 삶에 접근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었다. 절망적인 사건을 넘긴 소년이, 평화를 찾게 돕고 싶었다. 일상 속에서 꿈을 이루는 소년을 지켜볼 수 있길 바랐다. 소년은 이미 너무 고통받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삼킬 정도로 노력했다. 사내가 이뤄낸 목적도, 세상이 지켜낸 미래도 사내의 전사로 싸워준 소년에게 크게 빚진 것이었다. 이제는 소년이 합당한 보상을 받고 행복을 누려야 하는데.

소년의 삶에 빛을 드리울 수 있도록, 그를 제대로 알아야만 하는데.

어느 순간 사내의 시야에 저 멀리서 걸어오는 인영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잠든 소년 외엔 사내만이 있던 공간이고, 그마저도 암흑에 잠겨 바로 눈앞도 보이지 않았는데, 기묘한 일이었다.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인 존재는 점점 사내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가까워질수록 상대의 형체가 선명해진다. 체구가 작고, 언뜻 보기엔 소년 같고, 그리고.

눈앞이 갑자기 환해졌다. 드디어 기현상에서 벗어난 것일까. 몸도 자유로워진 것에 감사하며 원래 계획을 실행하려던 사내는 자신이 있는 곳이 회사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 멈칫했다. 조금 전까지 그가 묶여있던 공간은 분명 회사였는데, 어느새 사내는 바깥에 와 있었다. 장소를 알아보는 것이야 쉬웠다. 그가 자라난 도시의 한쪽, 살면서 흔히 지나쳐간 곳이었으니.

희한한 것은 눈앞의 풍경이 최근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사내의 기억이 맞다면 대략 3, 4년 전의 모습일 터였다. 소년의 기억이 끝나는 시점. 그러고 보면, 어둠이 걷히기 직전까지 사내에게로 걸어오는 자가 있었다. 빛이 드는 순간 확인한 얼굴은 영상 속 마지막 장면, 열 살 즈음의 소년과 겹쳐졌다.

어쩌면 사내는 소년의 삶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묶였던 게 아니라, 소년의 삶에 초대된 것일지도 모른다. 영상으론 확인할 수 없었던, 소년이 보여주지 않은 과거에. 그렇다면 조금 전까지 저에게 다가오던 소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소년을 찾아볼 생각으로 무작정 걸음을 뗀 사내는, 발밑에 무언가 걸리는 바람에 고작 몇 걸음을 옮기고서 멈춰야만 했다. 몸을 숙여 주워보니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소년이 언제나 목에 걸고 다니던 펜듈럼.

그거, 제 거예요. 돌려주세요.”

펜듈럼을 들여다보던 사내에게 자신 없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곳에 사람이 한두 명 더 있었다면 못 들었을지도 모를, 작은 소리였다. 사내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고, 짐작한 대로 소년을 볼 수 있었다. 갓 열 살을 넘긴 소년은 너무도 작았다. 사내에게 말을 걸어놓고도 혹 상대가 공격적으로 나설까 커다란 눈 가득 두려움을 얹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이 희망으로 선택했던 소년이, 세상에 빛을 선물했던 소년이 그토록 연약한 존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내가 소년을 처음 만나기 직전, 소년이 세상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 전까지. 소년은 성장기의 삼년을 저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세계에서 보내야 했다. 조그마한 아이에게는 너무 무거운 현실이었으리라. 무의식에 떨어진 때조차 그 기억을 재생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과 제대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아이가 타자에 더 두려움을 품게 해선 안 된다. 사내는 소년이 겁을 먹지 않도록, 소년에게 성큼 다가서는 대신 그 자리에 서서 펜듈럼을 흔들어 보였다.

이 펜듈럼 말이니?”

, 아버지가 주신 선물인데.”

잃어버렸어?”

……누가 빼앗아가서 멀리 던져버렸어요.”

속상하겠구나.”

부드럽게 말하자 소년의 눈에 살짝 눈물이 맺히는 게 보였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데, 주먹을 쥐면서 애써 참고 있었다.

그 애들 앞에서 울지는 않을 거예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싫어?”

울어버리면 도망자의 아들이라고 수군거리니까!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 게 싫어요. 도망친 게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아무도 믿지 않아. 조금만 약해 보이면 사카키 유우쇼처럼 비겁하게 사라질 거라면서.”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소년은 급히 제 입을 막았다. 아버지의 이름을 흘린 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한 것일까. 사내는 세상이 소년을 주목하기 전, 그에게 따라붙었다던 수식어를 떠올렸다. 사카키 유우쇼의 아들. 도망자의 자식. 죄인의 꼬리표처럼 불명예스러운 이름들. 프로 선수였던 아버지가 대회에 나타나지 않고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열 살을 갓 넘긴 아이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달게 했다. 조롱의 대상이 된 아비가, 소년의 삶을 완전히 뒤덮고 만 것이다.

네 아버지 성함이 사카키 유우쇼였구나.”

펜듈럼, 돌려주세요. 그것만 받고 바로 갈게요.”

다급한 목소리에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바로 소년에게 다가서지도, 소년에게 손짓하지도 않았다. 소년과 눈높이를 맞추려 몸을 숙이고 물을 뿐이었다.

이름을 이야기해줄래, 사카키 군?”

유우야.”

좋아, 유우야. 받아가렴.”

상대를 인지한 후로도 계속 유지되던 몇 발짝의 거리가, 천천히 좁혀졌다. 소년이 사내에게로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붉은 눈에는 경계가 비쳤으나, 조금 전과 같은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소년이 눈앞에 섰을 때, 사내는 먼지를 닦아낸 펜듈럼을 조심스레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중한 물건 같은데, 잘 간직하도록 해. 친절한 말과 함께. 소년은 사내의 기억 속 모습처럼 펜듈럼을 목에 걸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아버지를 모르는 분이었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카키란 이름만 나와도 다들 저를 힐끔거리니까요.”

글쎄, 사카키 유우쇼란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본 것 같지만.”

사내는 소년과 만나기 전 이미 그 아버지를 만나, 협력을 부탁했었다. ‘그 남자에 대해선 어쩌면 아들이 모르는 부분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를 사내였으나 그 사실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의 실종 3년째였던 열네 살 때도 소년은 아비의 그림자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므로. 자신을 지키기엔 너무도 약한 지금의 소년에게라면 더더욱, 아버지를 들먹이는 것은 좋지 않다. 압박감과 긴장을 안겼던 아버지의 이름 대신, 다른 것에 집중하도록 해야 했다.

알고 있다고 해도, 내게 사카키 유우쇼와 유우야는 다른 사람인데.”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이 자꾸 따라붙으니 네가 아버지의 흔적이 된 것 같아?”

……아버지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가끔씩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세요.”

그래, 네게 사카키 유우쇼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단 뜻이구나.”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버지는 정말 멋진 듀얼리스트여서.”

그럼 하나 묻지. 네 꿈은 아버지 같은 듀얼리스트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멋진 듀얼리스트가 되는 것일까?”

소년의 눈이 둥그레졌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려운 말을 던졌다는 생각에, 사내는 소년에게 조금 쉽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사카키 유우쇼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멋진 듀얼리스트가 될 수도 있잖아.”

“‘아버지 같은멋진 듀얼리스트가 되고 싶어요.”

네가 본 아버지가 멋진 듀얼리스트였기 때문에? 아니면 사람들이 바라니까?”

침묵이 길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긴 모습을 사내는 참을성 있게 지켜보았다. 소년은 아직 자신의 소망과 타인의 요구를 완벽하게 구분하기엔 어린 나이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바꾸고 싶은 것 같아요.”

오랜 기다림 끝에 흘러나온 말은 앞뒤가 잘려있었다.

무엇을?”

세상이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그럼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사람들이 더는 네 아버지를 조롱하지 않겠지. 그리고 너도, 여기 마이아미에서 미움받는 일은 없을 테고.”

.”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는 소망의 뿌리를, 소년은 그때 어렴풋이 알아챘으리라.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망도 끼어있었다는 것까지. 소년의 눈이 더욱 젖어들었다. 소년을 덮친 것이 제 가여운 처지에 대한 서글픔인지, 자기 욕망도 챙기려 들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소년이 오래 짊어져야 할 것은 아니었다. 사내는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가만히 속삭였다.

유우야. 미움받고 싶은 사람은 없어.”

소년이 특별히 나약했던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을 소망했을 뿐이다.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을 무대에 세우고,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게 하고, 여러 작품도 만들어내지 않던가. 소년의 아버지가 처음 프로의 길을 꿈꾼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환호를 양분 삼아 위로 올라가고, 무대를 꾸미고, 계속 사랑받게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빛나는 모습을 줄곧 지켜봐왔을 소년이 아버지처럼사랑받길 바라는 것은 놀랍지 않다.

아버지에 따라붙는 오명 때문에 의지할 사람을 찾기 힘들어진 지금이라면, 더욱.

무대에 서서 사랑받고 싶다는 것도, 나쁜 마음이 아냐. 듀얼리스트들은 대부분 그런 마음으로 데뷔하거든.”

……아버지만큼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아버지의 이름을 더 나쁘게 만들거나, 기대만큼 하지 못하면.”

내 아버지도 세상에 제법 알려진 사람이었지. 마이아미는 물론이고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아버지의 이름이 통했어. 하지만 내가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고 삼년이 지나니 아무도 아버지의 이름을 꺼내지 않더구나. 무슨 뜻인지 알겠니?”

잘할 수 있다고요?”

네가 데뷔한 순간부터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은 너, 사카키 유우야라는 거지. ‘를 잘 보여주겠다고 생각하면 돼. 물론 네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네가 잘해내면 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지 않겠어?”

사내의 목표는 소년에게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지워내는 것이었다. 소년이 아버지의 상에 매달려 그것을 재현하려 애쓰기보단, 무엇이든 자유롭게 제 방식대로 풀어가길 바랐다. 아버지란 키워드는 소년을 자꾸 과거의 사건에, 그로 인한 절망에 매어두고 있었다. 아버지를 좋은 이미지로 각인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은 이미 오랜 시간 소년을 짓누르기도 했다.

부모란 아이의 우상이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넘어서야 할 벽이기도 하다. 소년이 아버지를 계속 짊어지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부재로 부모를 졸업할기회를 잃어서였다. 언젠가 소년은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지만, 그때까지 소년이 아버지의 그림자에만 갇혀있게 해선 안 된다. 소년은 보다 건강한 날을 보낼 권리가 있었다. 성장기의 아이로서. 앞으로 자신만의 미래를 그릴 희망으로서.

아직까지 제가 배운 건 아버지의 엔터메 듀얼뿐인데.”

그래. 하지만 그걸 소화하는 것은 네 몫이지. 같은 학원의 같은 강사에게서 배운 학생들도 각자 다른 듀얼을 하잖아. 아버지의 듀얼을 계승하고 싶거든, 그 가르침을 계속 머리에 넣고서 네 길을 갈고 닦으면 돼. 너는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사카키 유우쇼의 아들이어서?”

사내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는 자신이 지켜보게 될 희망, 아직은 어린 소년의 머리를 서툴게 쓰다듬었다.

아니, ‘를 믿는 거다.”

사카키 유우야를. 덧붙인 이름은 3년 후, 세상에 계속 들리게 될 이름이었다. 새로운 가능성을 소개할 자의 이름이었고, 모두가 환호하는 무대를 만들 사람의 이름이었다. 한편으로 세상의 미래를 구할 전사의 이름이며, 어쩌면 프로 선수로서 정점에 오를지도 모를 소년의 이름이기도 했다. 미래를 아는 사내라면, 지금의 소년을 믿는다. 앞으로 소년이 쌓아갈 것도, 그려낼 것도 마찬가지.

처음 만났는데도?”

너에겐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야.”

성공할 가능성이?”

그래. ‘가능성이지. 너는 프로 듀얼리스트가 될 수 있고, 어쩌면 챔피언이 될 수도 있어. 어느 날 새로운 소환법을 선보여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지도 몰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는 거기까지지만 다른 것을 이룰 수도 있겠지.”

이뤄질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가능성이란 건 말이야, 반드시 이뤄진다는 예언이 아냐. 무엇이 피어날지 정해진 씨앗도 아니고. 종을 모를 씨앗을 땅에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준비하면서 끝까지 가꿔가는 노력에 더 가까워. 너에겐 가능한 일이지.”

너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잖아, 안 그래? 살짝 흘린 말에, 소년이 소매로 눈을 가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까지 가리진 못했지만, 사내는 조용한 울음을 보지 못한 체 소년이 답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노력, 하고 있어요.”

……그래, 분명히.”

너는 노력해왔어. 그것은 사내가 속으로 삼킨 말이었다. 절망과 고난을 안고도 3년 후의 소년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깨어나기만 한다면, 소년은 앞으로 더 빛나는 나날을 보낼 것이다. 사랑받고 싶다는 열망으로 무대를 준비했고, 그림자를 벗기 위해 세상에 나섰고, 결국 모두를 자신의 무대로 매혹시켰으니까.

너는 지금 네가 상상하는 걸 이뤄내.”

그러니 이런 예언쯤은 남겨주어도 될 것이다. 막연한 소망도 불확실한 예상도 아닌, 반드시 이뤄질 문장이었다. 사내가 경험한 미래고, 소년이 살아가는 현재의 이야기였으므로. 눈물을 다 닦아낸 소년은 웃음을 걸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눈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의 무거운 감정이 전부 걷힌 걸 알아차렸을 때.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두 사람이 선 곳을 가득 메웠다. 그 속에서 소년의 실루엣만이 선명했다. 조금 전 펜듈럼을 받아든 열 살 남짓의 소년에서, 중학교 교복을 입은 열네 살 소년의 모습으로, 세상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던 때의 모습으로. 소년의 실루엣은 순간순간 바뀌고 있었다.

기억 열람 기술로도 볼 수 없었던, 소년의 성장. 트라우마를 덮으려 노력하며 희망을 찾아가던 나날들. 그 순간순간을 감상하던 사내는, 소년이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을 때의 실루엣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모두가 소년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던 때. 아마도 소년이 가장 꿈꿔왔을 날에 내민 손을 인지했는지 소년이 악수해주었을 때,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 빛이 걷히고, 그 전까지 사내가 서 있었던 과거의 풍경은 사라졌으며, 사내가 소년과 함께 있었던 회사의 통제실이 눈에 들어왔다.

통신기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얌전히 놓여있었고, 책상에 올려둔 서류의 위치조차 바뀌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모든 것이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모든 것이 돌아왔을 때 사내가 책상에 엎드린 채였다는 것만 달랐다. 깊은 꿈이라도 꾸었던 것처럼.

아카바 레이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사내는 돌아보았다.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소년이, 거짓말처럼 문 쪽에 서 있었다. 오랜 잠 때문에 몸이 덜 풀렸는지 벽에 기대 서 있긴 하나 소년에게서 피로는 비치지 않는다. 마침내, 소년이 돌아왔다. 무의식의 심연에서 빠져나와, 멀쩡한 모습으로.

몸은 괜찮나?”

기운은 없는데 아프진 않아. 들어보니 내가 여기 LDS에서 제법 오래 잤다는데.”

그랬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어쩌다 LDS에 왔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소년이 변이하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은 단순히 소년만의 고난은 아니었다. 세계의 운명이 걸린 재앙과도 얽힌 일이었다. 근처에서 소년을 돕던 몇몇도 재앙에 휩쓸린 대가인지 그 일에 대해선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무의식에야 남아있을지도 모르나, 지금 헤집을 일은 아니다. 스스로 떠올리고 자신의 폭주를 인정할 수 있게 될 때 천천히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판단을 마친 사내는 적당히 답했다.

“MCS 기간 중 쇼크로 쓰러져, LDS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 대회는 어떻게 됐어? 끝났나?”

“2차전까지 마친 건 기억하겠지? 이제 남은 건 배틀로얄이야.”

쉴 틈이 없네. 배틀로얄이라니 더더욱.”

어차피 대회 중 일어난 일로 대회 자체를 잠깐 중단한 상태다. 조금 더 쉬었다 진행할 생각이야.”

집에 돌아가 편하게 있어도 된다는 뜻이다. 덧붙인 말에 소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상하게 불분명한 기억과, 쓰러져 있었다는 말에 당장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편한 곳에 가서 머리를 식히고 싶을 것이 뻔했다.

그럼, 준비된 때 다시 부르지. 의사의 말로는 큰 이상이 없다고 하지만, 혹시 모르니 몸을 잘 챙기도록.”

도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큰 문제 없이 깨어난 것 같아.”

다행이군. 배틀로얄을 기대해도 되겠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이 넘치는데. 비장의 패라도 있나?”

그런 건 아니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대회 내내 어쩔 수 없이 긴장했는데, 신기하게 마음이 편해졌거든. 좋은 꿈이라도 꾼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소년에게, 조금 전 만났던 3년 전의 소년이 겹쳐진다. 무거운 감정을 흘려버리고 희망을 생각한 때의, 열 살을 갓 넘긴 아이의 모습이.

……정말 만났던 건가.”

사내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소년의 눈이 둥그레졌다.

무슨 뜻이야?”

아니. 신경 쓸 것 없어. 대회와 관계된 이야기니까.”

설명을 덧댈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기에 사내는 대강 얼버무렸다. 소년도 별달리 의문을 품는 일 없이,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는 그대로 통제실을 빠져나간다. 소년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사내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소년을 살피느라 며칠간 거의 꿈도 꾸지 못했던 휴식이었다.

과거의 소년과 마주쳤던 것이, 환상이었는지 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사내가 잠깐 소년의 무의식에 떨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소년이 안고 살아온 트라우마를, 아버지의 부재로 생긴 내면의 굴을 덮어버리기 위해. 그러나 어느 쪽이건 그 끝에 소년이 깨어났다는 우연이 사내를 들뜨게 했다. 혹 소년의 에 사내가 없었더라도, 사내의 이 소년을 구하고 싶다는 열망이 꾸며낸 망상이었다 해도, 그것이 지나간 후 두 사람은 무사히 만났다. 기적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