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슌레이] 그림자 사제
베일을 쓴 사제가 붉은 창을 들고 밤의 풍경에 섞여들었다. 사제복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무기는 집행자의 표식. 성녀의 뜻을 대행하는 존재로서 그는 부정한 인간을 처리할 권한을 갖는다. 다만 집행자의 방식은 심판보다 사냥에 가깝다. 성녀는 표적을 가둬놓지 않으므로. 포박하는 일도, 연행하는 일도 없이 포착하는 대로 처리하는 것이 성녀의 원칙. 성녀에게 부정한 인간으로 규정되는 순간, 운명은 정해진다. 오직 성녀만을 따르는 집행자가 나타나 바로 숨을 거두어가고 만다. 붉은 창만 보면 모두가 ‘사냥’을 직감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밤을 휘젓고 다니던 사제의 걸음이 차차 느려진다. 가까운 곳에 타깃이 있다는 증거. 과연, 집행자의 걸음이 멈추는 곳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꽂히는 대상. 성녀가 죄인이라 지목한 자가 틀림없었다. 죄인이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성녀의 총애를 받는 집행자는 신의 축복이라도 따르는지 순식간에 죄인을 따라잡는다. 죄인과 처형인의 시선이 얽혔다. 베일을 쓰고 있음에도 집행자의 표정은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었다. 벌레를 보는 것 같은 싸늘함, 한 가닥 자비도 기대할 수 없는 불쾌. 그 냉랭함에 짓눌려 머뭇거린 때 종말이 닥쳐왔다. 기다란 창이 죄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마지막 순간 죄인의 귓속에 파고든 것은 우습게도 집행자가 읊는 기도문이었다. 희생제물을 위한 기도가 죄인의 명을 끊어버리는 상황과 희한하게 맞물렸다. 사제복을 입고도 대개 미친 짐승으로 취급되곤 하는 집행자는 기묘하게도 제 역할을 다할 때만은 사제처럼 굴었다. 한 생명을, 아니, 하나의 부정을 처리한 후. 집행자는 고개를 돌려, 몇 발짝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에게 사제복을 입히고 모든 것을 가르쳐준 성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충직한 수하가 죄인을 처리하는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았을 성녀는, 천천히 자신의 짐승에게 다가섰다. 창을 내린 집행자에게, 성녀는 빛을 드리웠다.
참혹한 살해가 숭고한 심판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
성녀는 어느 날 갑자기 나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통치자 앞에서 몇 차례 신비를 보인 이방인은 성녀의 이름으로 빠르게 자리를 확보했다. 통치자를 미혹시키는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수군거림은 그녀가 나라의 악을 하나둘 처리하면서 가라앉았다. 분명히, 그녀는 신비를 안고 있었다. 세상을 정화하는 힘을, 악을 흩어버릴 빛을 쥔 존재였다. 그녀가 나타난 때부터 나라엔 희망이 비쳤다. 먹구름이 걷히고 평화가 가까워졌다. 때문에 성녀가 머무는 곳은 성소가 되었고,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제들조차 성녀를 섬긴다는 이유로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 명, 성녀를 따르는 사제 중 한 명은 선망이 아닌 공포의 대상이었다. 처음부터 집행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청년이 그러했다. 형형히 빛나는 눈은 성직자는커녕 짐승을 연상시켰고, 성녀의 명령에 따라 행하는 임무도 모두를 겁먹게 했다. 그의 사냥에 우아함이나 엄숙함은 찾아볼 수도 없다. 사람들이 목격하는 것은 잔학한 살해뿐. 피를 뒤집어쓰고도 표정 하나 걸리지 않는 모습은 오싹하기 짝이 없었다.
집행자의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것도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뽑힌 사제들 틈에 그는 갑자기 끼어들었다. 피투성이로 나타난 청년을 거둬 사제로 내놓은 성녀는 ‘새로운 사제’에 대해선 길을 잃어 구해주었다고 설명할 뿐. 이국에서 도망쳐왔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익힌 것은 숨통을 끊어버리는 방법이 전부. 그런 자에게 성녀의 곁을 허락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분명히 성녀의 얼룩이었다.
공포와 불쾌만을 끌고 다니는 집행자는 하필 성녀의 총애를 받았다. 성녀는 여러 사제 중 청년을 가장 가까이 두었고, 그가 사냥을 마칠 때마다 그에게 빛을 드리워 성녀의 대행자임을 알렸다. 심지어 청년이 걸친 사제복조차 ‘형제’들과 달랐다. 성녀의 예복에 맞춰 특별히 디자인한 사제복을 입고서 그는 당당하게 성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집행자를 향한 성녀의 특별대우를 어차피 지나갈 관심이라 여기던 사제들은 나날이 두터워지는 애정에 당혹스러워했다.
성녀의 총애가 쉽게 걷히지 않으리란 걸 눈치챈 때부터 사제들은 집행자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런 것’은 성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이 대부분이었다. 그에 깔린 것은 위기감이나 질투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성녀를 걱정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녀의 답은 언제나 같았다.
[그 자는 내 그림자예요.]
주변에서 집행자의 존재를 문제 삼을 때마다 성녀가 돌려주는 말이었다.
[세상의 어둠을 정화하려면 부정한 것을 잘라내는 일도 필요하죠.]
일견 맞는 말이었다. 성녀는 지금껏 나라의 많은 암흑을 걷어내었고, 그에는 집행자의 사냥도 크게 기여했다. 성녀가 빛이라면 청년은 그녀의 그림자였다. 남들이 꺼리는 일, 경멸받을 일을 도맡아 하는 집행자를 크지 않은 포상으로 달래주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특별대우를 받는다 해서 집행자가 대단한 권력을 쥐는 것도 아니었다. 성녀의 관심과 보호가 다른 이들에게보다 조금 더 드리워지는 것뿐.
그러나 청년이 처리해야 할 부정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성녀는 명확하게 말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집행자가 언제까지 성녀의 그림자로 존재할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성녀가 ‘심판이 끝났음을’ 선언하지 않는 한, 집행자는 성녀를 따라다니며 무엇이든 처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집행자에게서 가장 경계하는 것이 그것이리라.
집행자는 내리꽂히는 시선을 삼키고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군거림이 따라붙지만 그는 어떤 말에도 반응하는 법이 없다. 그에게 성녀를 제외한 모든 이의 말은 그저 소음이었다. 귀담아들을 가치도 없거니와,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으므로. 그는 이 나라의 언어를 익히지 않았고, 성녀는 그에게 능숙한 말을 요구하지 않았다. 집행자에게 다른 사제들, 혹은 성녀를 추앙하는 많은 이들과 소통할 의무는 없다. 주인인 성녀의 명령만 제대로 듣고 수행하면 그만이었다.
청년이 피를 뒤집어쓰고 이 나라에 닿았을 때, 그의 피를 씻겨준 것은 성녀였다. 그에게 사제복을 내어준 것도, 곁을 허락한 것도 그녀. 거의 불리는 일 없는 이름도 성녀에게서 받았다. 마지막으로 받은 것이 창이었다. 성녀는 따로 용도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창을 받아든 때 청년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직감했다. 처음으로 성녀에게 이끌려 나간 날, 성녀가 부정한 인간을 지목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성녀가 인정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죄인일 뿐이다. 기다란 창이 죄인의 몸을 꿰뚫어 죽음을 내렸다. 그 날부터 청년은 성녀의 대행자로서, 공포가 되었다.
집행자의 창, 성녀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무기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제 청년이 그 창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모두 위협을 느낀다. 성녀 앞에서 행동을 조심하고 심판을 두려워하게 된다. 한편 청년은 왜 자신이 하사받은 무기가 붉은색이었는지 빠르게 이해했다. 앞으로 성녀를 위해 그에 피를 자주 묻혀야 한다는 것도. 당신은 두려움이 되어야 해. 저에게 베일을 씌워주면서 성녀가 흘린 말을 청년은 기억한다.
[사람들은 미지에 공포를 느끼고.]
그러니 얼굴도, 이름도, 출신도. 전부 신비로 남겨둬야겠지. 베일 너머로도 성녀의 웃음은 읽어낼 수 있었다. 얼굴을 가려도 성녀를 눈에 담는 덴 무리가 없었으므로, 청년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청년으로서도 얼굴을 가리는 것은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집행자는 사냥 외에도 이따금 누구도 모를 처리에 동원되었는데, 그럴 때 청년은 평소보다 가벼운 무기로, 보다 참혹한 살해를 저질렀다. 지저분하게 튄 피는 살갗 대신 베일에 묻었다. 살해엔 감흥이 없었으나 피를 닦아내는 것은 성가셨으므로, 청년은 타인에게 보이지 않을 처형조차도 베일을 쓰고 행하곤 했다.
이번에 청년이 동원되어야 할 일도 그러한 일이었다. 명확한 설명은 없어도 청년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대강 자신의 쓰임을 짐작한다. 약속된 장소로 향해, 성녀의 심문을 도우면 된다. 성녀에게 절대복종하는 집행자의 이야기란 이미 나라에 퍼져 있으므로 그의 존재 자체가 죄인에겐 위협이 되리라. 구제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성녀는 죄인을 풀어줄 것이고 마지막 희망마저 놓친다면 죄인은 집행자에게 떨어질 것이다. 성녀는 처형의 방식은 문제삼지 않았다.
성녀의 공간에 기척 없이 들어선 집행자는 자신 외의 방문자가 있음을 알고 눈이 둥그레졌다. 선전용 방송 화면에서나 보던 통치자가 성녀의 곁에 앉아있었다. 주인을 향해 걸어오는 사제에게 통치자의 시선이 잠깐 드리워졌다. 단정한 얼굴에 묘한 감정이 걸렸고.
“얼굴을 가리는 건 무슨 이유에서지?”
통치자가 성녀를 돌아보며 묻자, 짧은 답이 돌아왔다.
“흉측한 얼굴을 보이기 싫다고 하더군요.”
“처형인으로선 그리 흠 될 것도 아닐 텐데.”
그 후로도 집행자에 대해 사소한 말이 몇 마디 오갔으나 청년은 성녀의 곁을 지키고 설 뿐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통치자의 붉은 눈이 자꾸만 저를 훑는 것이 성가시긴 했지만, 권력의 구도는 그도 대강 읽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성녀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건 물론이었다. 청년이 움직인 것은 표적이 들어선 때부터였다. 사냥감을 마주한 포식자처럼, 그는 빠르게 창을 들었다.
이번의 죄인은 운이 나빴다. 성녀와 그 집행자는 물론, 통치자까지 마주해야만 했으니. 집행자는 자신의 표식이나 다름없는 창을 부러 죄인의 눈앞에 두었다. 성녀는 얼마든지 사제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었고, 통치자는 그의 심문에 끼어들 수도 있었다. 과연, 일부러 이곳을 찾았을 통치자는 바로 죄인에게 관심을 보였다.
“현혹자라고 했던가?”
“네. 말씀드린 대로. 지역에서의 제 영향력을 이용해 위험한 사상을 퍼트렸지요. 바로 처리하지 않은 건 죄가 가벼워서가 아니라, 그 영향력 때문에 반발이 일 것을 걱정해서였을 뿐입니다.”
성녀는 팔짱을 낀 채, 죄인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죄인은 창을 든 집행자와 온갖 숭고한 이름을 안은 성녀가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했다. 집행자가 잔혹한 것은 주인이 자비 없는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본래라면 심문을 거치겠지만 이번엔 죄가 명확하고 위험성이 커, 각하의 판단을 따르려 합니다.”
“어떻게 하길 바라지?”
“정해두지 않으셨나요?”
“그대가 현혹자라고 말했으니 처리해야겠지.”
그대의 선택은 언제나 내게 도움이 되었으니까. 예언가라도 대하는 듯한 태도에 성녀는 눈부신 웃음으로 답했다. 통치자는 집행자를 돌아보았고,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집행자는 편리한 무기를 꺼냈다. ‘이런 일’에까지 성녀가 하사한 무기를 쓸 이유는 없다.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성녀의 손이 닿지 않은 것, 성녀에게 구조되기 전부터 지녔던 무기를 쓰면 된다. 청년이 꺼내든 두세 장의 카드는 순식간에 기계 새로 화해 죄인에게 날아들었다. 죄인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이 찢기는 순간에도, 청년은 기계 새를 조종하며 무심하게 기도만 흘릴 뿐이었다.
집행자가 읊는 것은 성녀에게서 빌려온 기도문이었는데 이 나라의 언어이기에 의미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성녀가 읊는 기도는 여럿 있음에도, 청년이 죄인을 처리할 때마다 그것만을 반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성녀가 처음 읊었을 때 꼭 자장가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단조로운 음성이 묘한 안정감을 주어 저도 모르게 천천히 눈을 감았던 기억이 있다. 시야가 어둠에 잠겨도 청년은 제 몸을 감싸는 따뜻한 손길은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의 삶에 계속 따라붙을 문장이야. 성녀는 친절하게도 그의 언어로 속삭여주었다.
“희생제물 기도로군.”
“죽음을 내리는 사제에게 가장 어울리는 기도 아니겠어요.”
통치자와 성녀가 무어라 이야기했지만 집행자는 알아듣지 못한다. 성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걸 보니 오가는 것이 나쁜 이야기는 아니란 정도만 짐작할 뿐이다. 기계 새를 거두며 집행자는 조금이라도 빨리 통치자에게서 벗어나길 바랐다. 단둘이 있을 때만, 성녀와 이야기할 수 있다. 성녀가 그의 언어를 사용해 말을 걸어주고, 그에게 남들은 모를 친절을 베푼다. 물론 청년은 성녀의 것이었으므로, 성녀가 부를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살해의 증거를 적당히 처리한 청년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반듯하게 섰다.
“참 충직한 사제야. 말이 통한다면 치하라도 하련만.”
“치하는 제게 맡기시지요.”
셰이. 이름을 불리자 집행자는 훈련받은 짐승처럼 다가왔다. 성녀는 손을 내밀었고, 집행자는 베일을 살짝 걷어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돌아갈까요. 청년은 말 대신 표정으로 성녀의 뜻을 해석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볼 수 있나?”
“저에게 보이는 것도 부끄러워합니다.”
“아쉬운 일이군.”
“이 나라에 올 때 많이 다쳤으니까요. 회복하기야 했지만, 상처를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겠죠.”
적당히 둘러댔음에도 통치자의 시선은 집행자의 얼굴에, 베일로 가려진 곳에 꽂혔다. 슬그머니 베일로 손을 뻗기까지 했으나, 베일을 벗겨내기 직전 성녀가 그 손을 잡아챘다.
“보이고 싶지 않은 걸 헤집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저 사람이 저를 섬기며 나라에 봉사하는 사제임을 생각해주세요. 웃는 낯으로 덧붙인 말이었으나 목소리는 단호했다. 통치자는 더 고집을 피우지 않았고 이내 자리를 떴다. 성녀 또한 돌아가려 일어설 때, 청년이 그녀의 등에 물음을 던졌다.
「그 남자, 왜 이 일에 끼어들었어?」
성녀와 사제라는 위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만 유효하다. 서로만 보고 있을 때, 집행자는 자신의 언어로 멋대로 말을 건다. 나라를 쥔 통치자를 ‘그 남자’로 부르는 무신경함은 집행자에게나 가능한 불손함이다. 청년의 언어를 알아듣는 유일한 사람인 성녀는 굳이 그의 호칭을 수정해주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믿고 싶어 했던 거야.」
통치자는 성녀에게 영광과 힘을 안겼으나, 성녀의 신비 너머를 자꾸만 엿보려 들었다. 통치자의 붉은 눈을 들여다볼 때면 성녀는 그가 숨긴 진득한 욕망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성녀의 머릿속을 해부하고 싶어 했고, 그녀를 삼키기를 소망했다. 그 기괴한 욕구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통치자조차 모를 것이다.
「무엇을?」
「내가 선택한 것이 정말로 정의인지.」
「당신은 성녀잖아.」
그것이 ‘당신은 무조건 옳아’라는 뜻임을 성녀는 안다. 모두에게 경멸당하는 사제만큼 그녀의 신성을 확신하는 자도 없다. 성녀는 아끼는 자에게 살짝 웃어주며 답했다.
「너무 탓할 순 없어. 불신은 그 사람의 본능이거든. 결국은 내 뜻대로 움직여주겠지만.」
「성녀님은 미래가 보여?」
「어느 정도는?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온 건 예상대로였어. 그 자가 당신에게까지 관심을 보인 건 뜻밖이었지만.」
파장을 느끼는 건가? 이 나라의 일을 나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겠네. 뜻 모를 말에 사제는 살풋 얼굴을 찌푸린다.
「당신의 세계는 너무 어려워.」
「걱정할 것 없어. 거기에 들어올 수 있는 건 당신뿐이니까.」
「무슨 뜻이야?」
「내가 비밀을 말해줄 사람은 당신뿐이란 거야.」
내가 왜 여기에 왔고 당신이 왜 나를 만났으며, 각하는 왜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면서도 불신에 빠졌는지, 전부. 빠르게 쏟아낸 성녀는 집행자의 베일을 살그머니 벗겼다. 단둘이 있을 때나 내보이는 얼굴, 그녀 이외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단정한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야기할까?」
돌아올 답을 알면서도 성녀는 물었다. 그녀의 충직한 짐승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
성녀는 마지막 사제를 만난 날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청년은 성녀의 영역에 피 냄새를 이끌고 나타났다. 낡아빠진 코트를 적신 피는 바닥으로 흘러 불길한 흔적을 남겼다. 가슴과 배에 칼로 찔린 듯한 자국이 선명했으나 그는 지혈하기는커녕 그 자리에 석상처럼 박혀있을 뿐. 이대로라면, 죽는다. 아마 그것이 모두의 머릿속에 스친 생각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누구도 청년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성녀의 뜰에 함부로 들어선 신원불명의 남자라면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의 방치 속 청년이 숨을 거칠게 몰아쉴 때, 성녀가 그에게 다가섰다. 청년은 그녀의 품에 무너졌다.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에도 청년은 기를 쓰고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성녀가 상처를 살피기 위해 너덜너덜한 코트를 벗길 때 청년이 한마디 토해냈다. 구해줄, 필요, 없어. 이 나라에선 잊힌 언어로 흘린 말이었다. 그때 어떻게 답했던가 ─ 희미한 기척에 성녀는 돌아보았다. 그 날 구해내어 지금껏 곁에 둔 사람이 문가에 서 있었다. 피 냄새 대신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향수 내음을 두르고서.
청년은 향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흠뻑 뿌린 것은 혹 성소에 피 냄새를 흘리지 않을까 하는 그의 결벽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로 처리할 것이 있다는 말에 집행자를 풀어놓고 홀로 돌아왔더니 그새 처리를 마친 모양이었다. 들어와. 건조한 목소리에, 비로소 집행자는 그녀의 공간에 발을 들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전부 성녀님을 따르는 줄 알았는데.」
자연스레 성녀의 곁에 앉은 청년은 베일을 벗으며 말했다. 불만 섞인 표정에, 성녀는 그가 명령 없이 행한 처리가 어떤 것이었는지 빠르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국민은 그녀를 숭배하고 혹은 사랑했으나, 성녀를 통치자의 영역에서 끌어내려는 이들이 분명히 있었다. ‘부정한’ 인간으로 지목해 처리할 수 있는 대상도 한계가 있다. 공개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불만세력은 서서히 말려버리는 것이 쉬운 방법이다. 물론 성녀에 미쳐있는 집행자가 그때까지 기다릴 리 없었다. 성녀는 한 생명의 종말을 소리 없이 애도했다.
「원래 정의엔 불만이 따르는 법이야.」
「난 자비로운 성녀님이 아니어서 그런 건 치워버렸고.」
「성실하구나.」
「꾸짖어야 할 일 아닌가?」
덤덤한 반응에 집행자의 눈이 둥그레졌다. 독단적인 행동에 주인이 실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성녀는 자신만을 믿는 가여운 존재를 꾸짖을 생각이란 없었다. 아이를 달래듯, 성녀는 상냥하게 답했다. 내가 당신을 거둘 때, 이런 일까지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불순물을 전부 지워줄 사람이 필요했단 거지?」
「꼭 그런 것만은 아냐.」
우리가 만나는 건 처음부터 결정된 일이었어. 의미심장한 말에 집행자는 별을 보듯 그녀를 눈에 담았다. 통치자마저 제 편으로 만든 성녀였으나, 그녀가 아는 누구도 청년만큼 열렬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라면 특별대우를 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청년은 처음부터 그녀에게 타인이 아니었으니.
「내가 본 미래엔 당신이 있었으니까.」
「비밀을 이야기해주기로 했지. 지금 듣고 싶어. 우리가 만난 것이 정해진 미래였다면, 당신이 나를 구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어?」
「가장 듣고 싶은 게 그쪽이었던 모양이네.」
웃음을 걸치면서, 성녀는 청년을 구해낸 날 그의 무기력한 말에 돌려주었던 답을 떠올린다. 나는 당신을 구하기로 선택한 거야. 그 말에, 청년의 입술이 닫혔다. 청년의 몸에 새겨진 상처는 분명 생명을 위협할 만한 것이었으나 그 형태는 자해흔에 가까웠다. 구할 필요 없다는 말과 연결하면, 타인에게 상처를 입은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제 몸을 찔렀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도 삶을 끝내기 위해서. 청년은 성녀를 만난 것이 처음이었겠지만 그녀는 그가 극한의 절망에 떨어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가 왜 이 나라에 나타났는지도. 그러니 청년이 갈망하던 것이 무엇인지도, 바로 짚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바라는 평화를 줄 수 있어.]
힘주어 말하고서, 성녀는 청년의 배에 새겨진 상처를 자신의 손으로 가만히 쓸었다. 찢겨진 자리는 거짓말처럼 봉합되며 피가 멎었다. 성녀의 손이 가슴께로 향할 때도 청년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길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청년에게 빠르게 드리워지는 죽음을 쫓아낸 후, 성녀가 한 일은 그가 뒤집어쓴 피를 씻겨주는 것이었다. 공예품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듯, 성녀는 ‘죽음의 흔적’을 지워냈다. 그 모든 것이 끝난 때에야 청년은 정신을 잃었다.
청년이 깨어나기 전 성녀를 찾은 사제들은 침입자의 처분에 대해 물었다. 출신을 모르는 자를 성소에 오래 둘 수는 없습니다. 목적을 캐낸 후엔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그들이 바라는 것은 ‘위험’을 제거하는 것임을 성녀는 모르지 않았다.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만이 드나들던 성소가 더럽혀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것도. 그러나 성녀는 사제들에게 새로운 형제를 맞이하도록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그 남자를 정말 거둘 생각이십니까?]
기묘한 분위기 속, 모두가 상황을 살필 때 나이 지긋한 사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에는 ‘지금의 질서를 깰 생각이십니까?’라는 물음이 숨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외부인을, 이질적인 존재가 가져올 혼란을 지레 두려워하고 있었다. 분명, 청년은 보통의 사제가 될 수는 없었다. 그의 존재는 ‘형제’들의 평화를 뒤흔들 것이며, 사제의 이름을 의심하게 만들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섬기는 대상인 성녀의 얼룩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성녀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나와 일치해요. 아니, ‘우리’와 일치한다고 해야겠지요. 그대들이 모두를 빛으로 이끈다면 그는 그 빛을 만드는 데 기여할 겁니다.]
[함께할 사람이라면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그 자의 정체를, 말씀해주시지요.]
청년은 이 나라는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성녀는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었으나 ‘진실’을 설명한들 믿을 사람은 없었다. 이 세계에서 그는 환상에 불과했다. 존재한 적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인간.
[내가 이 나라에 오기 전 만났던 사람이에요.]
그러면 적당히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된다. 어차피 청년은 계속 성녀의 그림자로 살아갈 존재였다. 어느 순간엔 성녀와 함께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있었다. 그 날 성녀가 둘러댄 것은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히, 어딘가에서 청년을 만났다. 단순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삶이 얽혔고 서로를 의식하며 함께했다. 다만 그것이 모두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뿌리가 깊은 인연이었을 뿐이다.
[도움을, 얻은 사람입니까?]
[비슷해요. 그때 데려왔어야 했는데, 당시엔 힘을 쓰지 못했죠. 늦게나마 나타나주어서 다행이군요.]
이 사람의 이름은. 거기까지 말하고서, 성녀는 청년의 녹색 머리카락을 눈에 담았다. 저와 남매처럼 닮은 얼굴에도 얼마간 시선이 머물렀다. 이름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의 신분은 그녀의 혀로 만들어질 것이다.
[셰이.]
그 이름을 꺼낸 날 모든 것이 정해졌다. 청년은 성녀의 사람이어야 했고, 마지막 사제로 선택되었으며, 그의 역할은 집행자였다. 이름은 성녀가 지어준 대로 셰이. 나머지는 성녀의 뜻에 따라 전부 신비로 남겨놓는다. 깨어난 청년에게 성녀는 사제복부터 내밀었다. 자, 그걸 입는 거야. 입고서 내게 붙어있으면 돼. 청년은 그녀에게 의문을 건네지 않았다. 사제복을 입고 나와 확인을 구하듯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때 성녀는 직감했다. 이 사람은 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리라고.
그때 생각한 대로 되었다. 청년은 성녀의 집행자로서, 그녀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훌륭하게 제 임무를 해나가고 있었으니. 낯선 나라에 적응하지 못해 간간이 앓던 이방인은 이제 없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의 악몽에 비명을 지르던 가여운 청년도 없다. 충성스러운 수하는 완벽히 이 나라에, 성녀의 곁에 뿌리내렸으므로 그동안 간직하던 비밀을 그에게 털어놓아도 될 것이다. 성녀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당신을 구한 이유는 간단해. 어느 세계에서나, 당신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었거든.」
「세계?」
「나는 당신을 원래 세계에서 건져온 거야.」
당신은 다른 나라에서 여기로 온 게 아니야. 아예 다른 세계에서 이곳으로 왔지. 소설 같은 이야기에도 청년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자신이 절대복종하는 주인에게 쓸모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마냥 들뜬 것인지.
「억지로 데려온 건 아냐. 당신이 빛을 바라는 것 같아 빛을 드리웠는데, 반응하더라고.」
기억해? 이 나라에 오기 전, 당신에게 드리워졌던 빛 말이야. 성녀는 낮게 속삭였다. 세계를 넘어온 후유증으로 청년의 기억은 거의 훼손되었지만, 성녀는 그가 왜 빛을 소망했는지 잘 알고 있다. 청년의 삶은 언제나 끔찍한 악마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 악을 쓰러트리려는 인간의 노력이 그를 무너뜨리기도 했고, 악마가 그를 나락으로 추락시키는 때도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어느 세계에서도 청년은 행복을 찾을 수 없었다. 불행이야말로 그의 운명이고, 빛은 날 때부터 차단되었던 것처럼. 그 처참한 설계를 알기에 성녀는 한 번 그의 삶에 끼어들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느 세계에서도 청년은 그녀와 얽혀있었으므로. 그가 떠나온 세계에선 두 사람은 남매에 가까운 관계였다. 어느 세계에서는 청년이 그녀의 기사이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은 만날 수밖에 없다. 청년이 반드시 악마의 영향으로 무너진다면, 성녀는 반드시 악마를 퇴치했으니까.
「당신이었구나.」
청년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그려졌다. 삶을 끝낼 마음을 먹고도 빛을 따라온 것은, 그만큼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이 짙어서였으리라. 그러니 대부분의 기억을 잃고도 아직 그 기적만은 머리에 새겨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 빛을 따라오면 내게 닿도록, 설계해뒀어.」
「불시착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다는 거지?」
「물론.」
「그럼 성녀님이 나와 얽힌 건 실수가 아니었군. 나는 여기에 온 때부터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것도 없어서 잘못 떨어지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당신이 있던 세계와 여기는 수 세기의 시간적 간극이 있거든. 당신이 이곳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것도, 이곳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하지만 당신은 나와 말이 통하잖아. 내가 ‘어느 세계에서나’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우린 만난 적 있다는 건가? 그 때문에 여기서도 우리끼린 소통할 수 있었던 거라면.」
스스로 단서를 조합하는 청년에게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서히, 진실에 가까워진다. 운명처럼 시작된 관계도, 결국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거쳤던 모든 세계에 당신이 있었고, 모든 세계에서 우리는 만났지. 기적 같지 않아? 감상적인 말은, 오랜 적의 이름으로 끝난다.
「우리를 만나게 한 건 언제나 자크였어.」
그 기적의 연결고리가 청년을 망가뜨린 악마라는 것은 언제나 아이러니하다. 아마 청년의 운명에도 그 끔찍한 괴물이 새겨져 있으리라. 과연, 청년은 그 이름에 반응했다.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몰라. 당신의 세계에 존재했으니까. 자크는 수 세기 전에 나타난 최흉의 악이었지. 내가 처리해 그 존재를 지워버린 바람에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직도 자크의 파편은 세계에 흩어져 있어.」
「사람을 현혹시키는 빛.」
「그래. 바로 그게 자크의 파편이고, 현혹자의 근원이야.」
‘현혹자는 부정한 인간. 세상은 부정을 원하지 않는다.’ 성녀의 마지막 사제는, 경전의 한 구절이라도 되는 듯 그녀의 가르침을 읊었다. 그녀의 사상은 간결하고, 그만큼 무겁다. 지나치게 명료한 기준과 자비 없는 처분은 결벽적이라는 평까지 듣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어떤 의문 없이 삼킬 수 있는 것은 눈앞의 청년뿐일 것이다. 청년은 정의를 따른다기보다 그녀를 신앙으로 삼았으니.
성녀의 선택에 의문을 품으면 악을 심판하는 일도 멈춘다. 성녀는 더 나아갈 수 없고, 악은 인간의 약한 감정에 기생해 또다시 세력을 키울 것이므로. 우아한 태도나 교양보다 사제에게 중요한 것은 성녀를 믿는 것. 그러니 당신을 곁에 둘 수밖에. 성녀는 가장 신임하는 사제에게 답을 주었다.
「당신은 원래 세계에서도, 또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이 모를 세계에서도, 여기서도 자크에 맞서왔어. 나를 도와서 말이야. 보통은 그 과정에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당신이 온 세계는 우리에게 가장 가혹한 세계였어.」
「여기는 괜찮은 세계야?」
「우리에게 유리한 세계야. 나는 성녀로 다수에게 지지를 얻고, 당신은 내 보호를 받고, 총통 각하도…….」
「총통이 왜?」
「그 남자, 사카키는 자크의 후손이거든. 자크도 한때는 인간이었으니까, 피가 이어졌다 해도 놀랄 건 없어. 그 남자가 나를 믿게 된 것도 <조상> 자크의 악몽을 없애줘서인걸.」
통치자에게 접근해, 그가 오래도록 앓아오던 환상을 흩어버리는 것으로 신뢰를 얻는다. 조언자로서 계속 통치자에 영향을 미치며, 그에게 뿌리내린 악을 조금씩 희석시킨다. 성녀의 계획은 전부 성공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힘과 신성을 업고서 성녀는 이 세계를 정화하고 있다 ─ 다만 하나의 변수가 남아있다면.
「그런데도 당신을 완전히 믿지 못하다니.」
「그래서 믿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자크는 끈질겨. 대를 거치면서 영향력이 많이 옅어지긴 했어도 자크의 욕망 자체가 잘려나가진 않았을 거야. 부활하려는 욕망이 남아있다면, 내면에선 날 방해자로 인식할 수밖에.」
성녀가 경계하는 것은, 임무의 성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하나의 변수는 통치자가 조상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내지 못할 가능성. 그 남자가 당신에게 보이는 관심도 말이야, 아마 자크의 잔재일 거야. 쟁그랍지, 수백 년이나 지나서도 완전히 죽지 않은 괴물이란 건. 성녀는 살며시 집행자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짙은 향수 내음이 머리를 친다. 인위적인 향내로 피를 덮을 순 있어도 청년의 영혼에 새겨지는 죄까지 지워낼 수는 없다. 성녀의 조언이 닿지 않을 때, 통치자가 자주 근원 모를 충동에 흔들리는 것처럼.
「그 남자가 자크에 휩쓸리면, 처리할 거지?」
「그 전에 막을 수 있어. 지금까지 여러 세계를 거쳐왔지만, 나는 한 번도 자크를 무너뜨리지 못한 적 없으니까.」
다만 눈앞의 청년을 구하지 못했을 뿐이다. 악마를 쓰러트린 때 청년은 반드시 불행해졌고, 목적이 끝난 성녀는 또 다른 세계를 구해야만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넘겨버려도 그만이지만, 성녀는 가장 불행했던 세계의 청년에게 손을 뻗었다. 그 선택은 성녀의 목표를 확장시켰다.
「당신은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줬고,」
이 세계에서 이루어낼 것은 운명의 반복이다. 성녀는 청년을 집행자로 두고서 또다시 악을 심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닿은 세계 중 가장 유리한 세계에서 정의를 실행하고, 자신을 찾아준 청년의 불행까지 끊는 것이 성녀의 목표. 청년이 살아갈 이번 세계는 동화 같은 곳이어야 했다. 동화의 결말은 진부하나 상냥하다. 악을 끝까지 징벌하는 것과 동시에 작은 선의에도 보답을 준다. 어쩌면 동화에서 가장 비현실인 부분이란 그 정직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를 끌어안고 기적을 베푸는 것이 성녀이지 않은가. 한 사람의 삶에 보람을 가르쳐주는 것도, 비극의 흔적을 지워주는 것도 성녀에게는 가능하다.
“그러니 이번엔, 꼭 구해줄게, 슌.”
청년을 꼭 끌어안고서 성녀는 속삭였다. 구원을 약속한 달콤한 말이었으나 그녀의 집행자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미래의 언어는 물론, 이제는 유물이 된 이름까지도.
「방금, 무언가 말했어?」
「의미 없는 이야기였어.」
지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실행될 예언이므로, 성녀는 굳이 청년의 언어로 바꿔주지 않았다. 청년도 더 묻지 않고, 성녀의 온기를 확실하게 느끼고 싶은 양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