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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슌] Russian roulette

현소야 2015. 6. 22. 23:37

 

언젠가부터 세상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천천히 찾아든 그림자는 차츰 세상을 잠식하게 되었다. 전쟁이라는 이름으로였다. 침략자들은 파고드는 곳마다 자신들의 표식을 남기며 절망을 뿌렸다. 먼 곳에서 시작된 그림자는 그렇듯 불행한 국가들을 삼키며 세를 키워갔다. 마침내 평화롭기 그지없는 사내의 나라에까지 주변국의 불운한 소식이 흘러들어왔다. 안온한 국가에는 결코 찾아들지 않을 듯한 참혹한 재앙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는 머잖아 전쟁이 제 세상에 닥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근거 없는 직감이 아니라 확고한 예언이었다. 주변국을 하나하나 삼키며 몸집을 불려온 침략자가 이 평온한 나라마저 손에 넣으려 들이닥치리라는. 저 높은 곳에서 군림하며 세상을 지키려 노력하는 그에게, 그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사내는 스스로 재앙을 막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사내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몰래 전사를 키워왔다. 그를 위해 충성하고 세상을 지키려 불길 속에 뛰어들 수 있는 용맹한 전사들을. 세상의 평화를 위해 비밀스런 훈련을 소화해낸 전사들은 머잖아 침략자를 저지하려 싸우게 될 것이다. 그 크나큰 재앙 앞에서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내는 모든 변수를 고려하여 적의 행동을 예측한다. 그것을 토대로 지휘관으로서 작전을 세워, 적의 목을 조일 심산이었다.

그렇게 사내가 작전에 대해 고심하던 날이었다. 밖에서 한동안 소란이 일더니, 사내 앞에 한 청년이 붙들려왔다. 소란을 일으킨 것은 청년인 모양이었다. 몰래 침입하려 한 것인가. 그게 아니면 염탐하려 했나. 사내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안경 너머로 청년을 살폈다. 청년은 날카로운 금빛 눈으로 사내를 쏘아보고 있었다. 길들이지 않은 짐승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으나, 경호원들이 우악스레 팔을 꺾어 행동을 봉한 탓에 사내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무슨 일이지.”

이 녀석이 몰래 숨어들어선 이곳의 수장을 만나야 한다며 난동을 피우기에…….”

경호원이 고했다. 사내는 청년을 자세히 훑었다. 채 스물도 되지 않은, 아마도 저와 비슷한 나이일 청년이었다. 앳된 얼굴은 핏기가 없고 키에 비해 몸이 상당히 가늘었으며 온몸을 감싼 코트는 너덜너덜하다. 그나마 드러난 손에는 드문드문 상처가 보였으며 표정 없는 얼굴에는 피로가 비친다. 사내의 시선이 청년의 목을 감싼 붉은 스카프에 머물렀다. 붉은 천을 두르고 다니는 것은 <저항군>의 표식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자는 레지스탕스인가.

만일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청년의 남루한 행색이나 무모한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이국의 저항군. 침략자에게 철저히 짓밟힌 이후, 생존자들은 레지스탕스를 구축하여 적을 막아내기 위한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다. 침략자를 경계하면서부터 그 피해자인 그들에 대한 소식을 들어왔던 사내였다. 그러나 아무리 치열하게 싸운들 밀려오는 정예병에게 맞서기엔 역부족. 이제는 거의 국가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 채 희망 없는 싸움을 계속한다고 들었다.

그가 레지스탕스라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싸움을 거듭한 이라면, 과연 저렇게 피폐하고 앙상할만했다. 무모하고 거친 방식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가 왜 갑자기 이곳에 찾아들었단 말인가. 사내는 청년에게 물었다.

왜 나를 만나려 했지?”

원군이 필요하다.”

원군?”

다짜고짜 원군을 요구한 청년은 사내를 설득하려는 양 말을 잇는다.

아카바 레오와 적대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 자를 막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는 것도. 우리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거야. 지금 아카데미아는 우리 엑시즈를 공격하고 있지만 우리를 무너뜨리면 바로 이곳에까지 불똥이 튈 거다. 그러니 우리 레지스탕스 선에서 막아낼 수 있도록 너희가 돕는 거지. 아카바 레오를 막고 더 나아가 너희 시민을 지키기 위해서.”

일단 저 자를 풀어줘.”

청년을 옥죄던 손이 단숨에 풀렸다. 사내는 청년을 제 맞은편에 앉히고, 수하들을 물렸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원군이라. 우리가 아카바 레오와 대항하는 건 사실이지만, 같은 적과 싸운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내 군사를 내어줄 수는 없다. 더구나 너희는 이미 참혹하게 패배하지 않았나? 이번에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 만일 너희가 다시 실패할 경우, 우리의 타격은?”

사내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는 지휘관이자 이곳의 군주였기 때문에, 득실을 따져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청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었다.

우리가 그만한 것을 담보한다면, 그렇다면 믿고 내어줄 수 있나?”

글쎄.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목숨을 건다면?”

침묵이 흘렀다. 사내는 안경을 고쳐 썼다. 대체 저 자는 무엇을.

목숨을 건다? 네 목숨값으로 원군을 내어달라는 건가?”

예상치 못한 말에 되물었으나, 청년에게선 망설임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다. 이미 그는 모든 것을 내버릴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절박한 것이리라.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이라면 그리 드물지는 않지만, 목숨까지 내거는 인간은 흔치 않다. 어쨌건 생물에게 생존이란 최대의 목표이며 본능으로 사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그건 아니다만, 네 목숨에 그만큼의 가치가 있나?”

그건 네가 내 목숨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원군을 요청하러 왔다고는 하나, 청년은 비굴하기는커녕 시종 당당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제 목숨을 걸며 아슬아슬한 거래를 하려 든다. 제게 남은 유일한 것마저 담보할 수 있을 정도로 목적에 충실한 인간이라. 사내는 판단을 수정하기로 했다. 믿어볼만한 가치는 있는 인간이라고.

좋아.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적어도 내 군사들을 허망하게 죽게 하진 않겠군. , 어떻게 걸 생각이지? 네 목숨 말이다.”

승낙의 뜻을 내비치는 사내의 모습에 청년은 가슴 깊은 곳에서 서서히 희망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목숨을 걸어도 좋았다. 제게 남은 건 모두 바쳐서라도, 미래를 구하지 않으면.

러시안 룰렛이라고 아나?”

.”

리볼버에 총탄을 하나 넣고 양자가 차례대로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민 채 방아쇠를 당기지.”

내 목숨까지 걸란 뜻이군.”

아니. 그래선 공정하지 않지. 목숨을 거는 건 나 혼자만이다. 나는 내 머리를 겨누고, 너는 다른 곳을 겨눈다. , 너에겐 전혀 해가 가지 않아. 너도 나도 잃을 것이 없어. 너는 군사 외에 내줄 게 없고 나는 목숨 외엔 버릴 게 없으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청년은 텅 빈 얼굴에 엷은 웃음을 걸친다. 그 공허한 얼굴을 응시하며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굳이 목숨을 걸어서까지 원군을 얻어내려는 목적이 뭐지.”

그야, 우리의 미래를 구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네가 여기서 목숨을 버린다면 너희에겐 그만큼의 타격이 가는 게 아닌가? 레지스탕스는 이미 궤멸 직전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나하나의 목숨이 중요할 터. 너 하나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절박한가?”

내 목숨은 이미 의미가 없다. 원군을 얻지 못한다면, 그래서 적을 막아낼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면 돌아간대도 아무런 쓸모가 없어. 차라리 목숨을 거는 게 나아. 그만큼은 걸어야 상대도 생각해볼 테니.”

사내가 처음 판단한 대로 청년은 절박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내걸 준비가 되어있으며, 그 결심을 확실히 실행하려 든다. <목숨>으로 대표되는 제 전부를 거래를 위해 내어놓으려 하는 것이 그 절박함을 바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사내는 청년에 대해 섬뜩한 진단을 내린다. 그는 병든 사람일 것이라고. 목적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내부가 썩어문드러지고 말았으리라고. 그의 내부는 뿌리부터 썩어, 환부를 도려내는 것만으로는 병증을 치유할 수 없다고. 도려내려 한다면 그라는 인간 전부를 새로 쓸 수밖에 없으리라고.

사내는 자신을 찾아든 청년의 병증에 오싹해진다. 동시에, 감탄했다.

저만큼이나 필사적인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

그럼 이렇게 해볼까. 원군은 네가 목숨을 건 대가로 확정적으로 내주도록 하지. 다만 네가 이길 경우 원군을 내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 외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거다.”

이것은 그의 절대적인 의지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청년이 제 목숨을 담보하는 것에 그 정도의 보상쯤은 따라도 된다고 생각했다.

소원이라.”

하나 말해.”

사람을 찾아줬으면 한다. 꼭 구해야 하는 사람이 있어. 아카데미아 놈들에게 납치되어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지. 만일 내가 이기면 이 아이를 찾아줘. 그게 내 소원이다.”

그러면서 청년은 품속에서 낡은 사진을 꺼내 내밀었다. 사진 속의 사람은 청년과 닮은 소녀였다.

가족인가.”

그래. 내 누이다.”

이름은?”

루리. 쿠로사키 루리.”

좋아.”

사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줄 생각이었으나 청년의 소원은 의외로 소박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에게는 최우선의 소원이리라. 그렇게 합의가 이루어져, 청년은 리볼버를 꺼냈다. 전쟁 초기, 적에게 굴복해야 할 날이 오면 목숨을 끊기 위해 챙겨둔 것이었다. 희망 없는 싸움을 거듭하면서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기고픈 유혹에 휩싸였던가. 그러나 언제나 죽음은 유예된다. 방아쇠에 손을 얹다가도 차마 당기지 못해 총을 내려두고 마는 것이다.

처음엔 미련 때문이었다. 삶에 대한 미련이 두려움을 불러 죽음을 미루었다. 이후에는 책무 때문이었다. 동지들이 죽어갈 때마다, 낯익은 얼굴이 사라질 때마다 그들의 삶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책무에 짓눌렸다. 사라진 이들을 짊어지기 위해 살았고 살기 위해 죽음을 미뤘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 청년은 알지 못한다. 미련은 사라지고 책무에도 지쳤다. 그런데도 질기게 연명하고 있었다. 이젠 의미조차 없는 삶인데. 약실에 총탄을 넣으며 청년은 자조한다.

나부터 가지.”

중저음의 목소리가 공간을 공허하게 울렸다. 청년이 먼저 머리에 총구를 들이민 채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내는 리볼버를 건네받아 천장을 겨누었다. 잠잠했다.

다시 청년의 차례. 청년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세상은 평온하다.

사내의 차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청년의 차례였다. 확률은 1/2. 청년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두렵지는 않나.”

그 전까지 아무 말도 없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사내의 물음에 청년은 덤덤한 목소리로 답한다.

조금도.”

잃을 게 없기 때문인가.”

어차피 목적은 이뤘다. 이제 와서 어떤 결말이 닥치건 상관없어.”

무엇이든 만족한다는 뜻인지.”

. 그래.”

처음부터, 원군을 구하기 위해 사내를 찾은 것부터 일종의 도박이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사내가 제 군사를 순순히 내주리라 기대한 적은 없다. 이쪽에서도 무언가를 걸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다면 무엇을 걸어야 하는가. 청년은 제가 가진 것을 돌아보았다. 소중한 것은 모두 빼앗겼다. 남은 것은 목숨뿐. 세상이 짓밟히고 누이를 빼앗긴 후부터 삶은 의미를 잃은 지 오래. 오히려 제게 남은 유일한 것인 목숨이라도 걸어서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으리라고. 죽어간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서 미래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내 목표는 이걸로 종결되니까.”

그러므로 망설임은 없다. 어떤 결말이 온다 해도.

청년은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