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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6.20 [소라+슌] 악마에겐 악의가 없다

 

  도시의 중심부에 당당하게 치솟은 회사 건물은 지극히 화려하고 웅장했다. 이곳을 대표하는, 아니, 세계를 노리고 있는 대기업의 본사에 걸맞은 모습이다. 이 거대하고 화사한 건물은 첨단 시설을 갖춘 아름다운 내부로도 유명했으나 사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여러 비밀스런 공간을 숨기고 있었다. 이를테면 위험한 실험을 거듭하는 실험실이나, 도시의 모든 움직임을 분석하는 분석실, 위험인물을 가둬두는 방 따위의. 그리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감시카메라가 자리하고 있었다. 감시카메라 화면 너머 대상의 움직임은 관제실에서 모두 쫓고 있다.

  그 숨겨진 방 중 하나의 영상이 관제실의 화면 가득 잡힌다.

  화면 너머로 비치는 좁은 방에는 한 소년이 갇혀 있었다. 결박된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신체의 자유는 이미 빼앗긴 채다. 굳게 닫힌 문은 안에서는 결코 열 수 없고 방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는 소년의 행동을 낱낱이 훑고 있었으므로. 사냥꾼에게 붙들린 사냥감처럼, 혹은 수감된 죄수처럼 처량한 풍경이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년에게는 조금 가혹해 보이는 처사였으나 그 누구도 감히 소년에 대해 동정의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모두 소년을 경계하고 있었다. 소년이 어떠한 인간이며, 어떤 사상으로 움직이는지,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할지 대개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소년은 으로 간주되고 있다. 소년이 행하는 모든 행동은 시민을 해칠 수 있는 위험행동으로 분류된다. 소년은 위험인물로서 이곳에 수감된 것이다. 처음에는 본색을 숨기고 시민들 틈에 섞여있었던 소년이었으나 결국 모든 것이 드러났다. 그 정체는 적대하는 이세계에서 온 전사. 전투로 인한 부상을 치료하지도 못한 채 소년은 자유를 잃었다.

  처음에 붙들렸을 때 소년은 저항했다. 저를 감시하던 이들을 모두 떨쳐내고는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탈출은 잠시뿐. 어디든 회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이 도시에서 완전히 도망치기란 애초에 무리였다. 붙들려온 소년은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다시 갇혔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의 탈출과 몇 번의 거친 저항이 있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은 지금처럼 얌전히 붙들려있게 되었다.

  이제 소년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도주를 위한 장치도, 즐겨 사용하던 무기도 빼앗긴 채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기 때문에. 거듭된 실패로 풀이 죽어있긴 하나 여전히 소년은 위험인물. 감시카메라는 무심하게 소년의 모든 것을 포착한다. 소년의 강력한 힘도, 오만한 사상도 이곳에서는 의미를 잃었다 이세계의 강력한 전사는 평범한 소년으로 격하된다.

  회사는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소년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으나 그에 대한 처분은 아직도 결정되지 않은 사항이었다. 본디 소년은 적대하고 있는 곳에서 파견된 전사.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쉬이 풀어줄 수는 없었다. 신체의 자유를 빼앗은 채 머릿속을 파고들어 그 본거지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정보를 캐내는 것으로 목적이 종료된다면, 다음에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여기서 모두는 침묵한다. 소년에 대한 처분은 언제나 골치 아픈 사항이다.

  위험한 인간을 밖에 풀어주는 것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오래도록 붙들려 있었던 만큼 이 세계의 사람들을 공격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곳에 언제까지고 가둬놓는 것도 어렵다. 극비리에 진행되는 간부 회의에서는 이미 몇 번이고 나왔던 논제였으나 언제든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시 소집된 회의에서 여느 때처럼 처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때였다. 누군가가 의견을 냈다. 소년의 모든 정보를 캐낸 후에 기억을 조작하여 아군으로 만들어 합류시키자고.

  나쁘지 않은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조작 기술은 뛰어났고 소년은 여러모로 골치 아픈 존재였기 때문에. 위험성을 제거하고 아군으로 돌려버리는 것도 괜찮은 처분이 아닐지. 소년의 뛰어난 실력은 적일 때엔 몹시 곤란한 것이지만 만일 아군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잠자코 듣던 자들 중 하나가 격렬히 반대했다. 간부가 아니면서도 회의에 참여한 유일한 사람이자, 소년과 적대하던 청년. 간부들의 눈이 가늘어진다.

  저것은 위험한 인간이다.

  청년에 대한 그러한 진단은 그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마찬가지로 이세계 출신인 청년은 한때 무차별적으로 이곳에 대한 습격을 거듭한 전적이 있었다. 공통의 목적으로 뭉친 후 사장이 협력자로서 대우하고는 있으나, 언제나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 조악한 성정과 에게 표출되는 극도의 공격성에 대해서는 통제 불능이라는 결론이 내려진 바 있다. 다만 사장이 그를 회의에 참여시킨 건 직접적인 피해자에게 처분의 기회를 주고자 하는 명분 때문이리라.

  “걱정할 것 없다. 기억에는 손을 대지 않아.”

  의장으로서 상좌에 앉은 사장이 침착하게 달랬음에도 그의 흥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뿌리 깊은 증오가 엿보이는 그 금빛 눈은 무차별적으로 습격을 거듭할 때와 꼭 같은 빛이었다. 청년은 불신 가득한 눈으로 몇 번이고 상대에게 확답과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겨우 수긍하고 자리를 떴다.

  “그에게는 증오할 인간이 필요할 터다.”

  질린 듯한 눈으로 청년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간부에게 사장이 말했다. 청년은 어쨌든 피해자였고 사냥꾼에게 쫓기던 먹잇감이었다. 소년이 몸담은 군대에 짓밟혀, 그를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이다.

  “시운인 소라가 자기네를 공격한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지.”

  그럼에도 청년에게는 증오할 대상이 필요했다.

  증오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적에 대한 그 극단적인 증오는 그를 싸우게 하는 동력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빼앗기고 목적을 위해 인간다움마저 버린 그에게 남은 것은 증오나 분노 따위의 날선 감정뿐. 그 대상이 자신에게 해를 입힌 당사자냐 아니냐는 이미 중요치 않았다. 그 격렬한 감정조차 걷어내면 청년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전쟁이 빚어낸 괴물인 것인가. 안경을 고쳐 쓰며 사장은 감상을 속으로 삼킨다. 제 아비가 뿌린 재앙이 이런 식으로 돌아온 것이다. 미래를 꿈꿔야 할 청년이 증오와 분노로 연명하며, 적으로 판단한 이에게 폭력을 쓰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더 나아가 적의 목을 조이기 위해서라면 그와 전혀 상관없는 무고한 인간들마저 표적으로 삼으려 든다. 심지어 그가 사용하는 폭력은 그를 짓밟은 적의 수단과 꼭 같았다. 가해자가 빚어낸 가해자인 셈이다.

  반대로 소년은 철저히 가해자의 사상에 젖어있었다. 재앙 그 자체인 전쟁을 동경하며 감히 숭고한 싸움으로 칭하는 것이다. 동지들에게 짓밟히는 불행한 희생자를 사냥감으로 치부하며 사냥꾼을 자처하는 자. 어디서부터 비틀렸는지 짐작할 수도 없다. 청년이 전쟁이 빚어낸 괴물이라면, 소년은 전쟁이 키워낸 악마이리라.

  “그렇다면 분풀이를 하려 들진 않을까요?”

  “쿠로사키가?”

  간부의 말에 반문했다. 간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청년의 성정을 알기에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사장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아는 청년은 적어도 지금은 소년을 공격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는 세상의 재건을 위해 움직이는 전사. 목적을 위해선 분을 삭이고 때를 노릴 줄도 아는 인간이었다.

  “이용가치가 남아있을 때까지 시운인 소라는 안전하다.”

  “그 이후는…….”

  “걱정할 필요 없다.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

  필요한 정보를 모두 긁어내어 소년의 이용가치가 사라지는 때쯤엔 소년의 본거지를 향한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아무리 증오로 움직이는 청년이라지만, 일의 경중은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이다. 소년 하나를 노리는 대신 진짜 싸움에 열중하리라. 사내는 회의실을 떠나 관제실로 향했다. 모든 변수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군림하는 왕. 제 백성의 안전을 위해, 닥칠 수 있는 모든 위험을 살펴야 할 때였다.

 

*

 

  청년은 제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혼자 지내기엔 너무도 넓은 방. 적의 아들인 젊은 사장이 내준 방은 정갈하고 넓어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저와 나이가 비슷한 사장의 대우엔 흠결이 없다.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일시적인 협력이라지만, 협력자인 자신의 모든 편의를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물론 그 또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장기짝을 세심하게 관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청년은 냉소한다.

  살아가던 세상이 이세계의 침략자에게 완전히 짓밟힌 이후, 많은 이들을 잃고 누이마저 빼앗긴 후, 그는 누구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날을 세운 채 방어 태세를 취하며 모든 것을 경계했다. 그것이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는 것은 분명했으나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지 않은가. 함께 싸우던 동지조차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무사히 버텨야 했다.

  적을 무찌르고, 세상을 재건하기 위해.

  그가 버티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 때문이었다. 제 나이에 맞지 않는 너무도 무거운 것을 짊어진 채 청년은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다. 증오해마지않는 적이 세상을 삼켰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고 그 사명을 잊은 적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살아남은 이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 침략자. 그 증오스러운 족속들.

  그 단어들을 되뇌면 세상을 짓밟던 낯선 이들의 모습이, 세상에 재앙을 가져온 사냥꾼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진다. 모두의 불행 앞에서 웃으며 사람들을 차근차근 없애가던 자들. 그들 앞에서 모두는 한낱 먹잇감으로 쫓길 뿐. 폐허가 된 세상을 뛰어넘어 이세계로 왔건만, 이곳에마저 적이 있었다. 전쟁을 헌팅 게임이라 칭하는 어린 괴물이.

  청년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차례로 돌이켜보았다. 시운인 소라의 처분을 위한 간부들의 논의. 기억을 지워 아군으로 만들자는 의견. 자신의 격렬한 항의. 사장의 중재.

  결국 기억조작은 하지 않기로 결론지었던가. 그럼에도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약속을 받았다.

  시운인 소라의 기억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 것은 그 소년이 죄책감 없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괴물을 죄 없는 선량한 인간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시운인 소라는 끝까지 그 죄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용가치 때문에, 혹은 위험성이 두려워 면죄부를 주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짓밟힌 사람들은? 사라져간 동료들은? 그 모든 것을 단지 헌팅게임과 그 먹잇감으로 치부한 괴물을 그가 용납해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소년은 그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당사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 사상에 물들어 그것을 유희로 생각하는, 그와 같은 족속이다. 청년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소년은 진짜 원흉이 아니기에 결국 이 모든 것은 위안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청년에겐 그것이라도 간절했다. 소년이 괴물로서 모든 것을 감당하길 바랐기에.

  아직껏 절망은 선명하고 증오는 깊다. 직접적으로 짓밟힌 적이 없는 이곳 사람들이 소년에 대해 연민하건, 자비를 베풀려 하건, 청년은 결코 소년을 용서할 수 없었다. 소년이 자라난 곳과 그곳에서 받았던 교육을 생각해 그 죄를 희석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다. 청년에게 소년은 악의 없는 악마였다. 악의가 없다고 악행이 없던 일이 되던가? 그것은 죄의식 없는 어린아이가 곤충의 다리를 쥐어뜯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청년은 지금의 결론에 만족한다. 악마에게서 죄를 지워내고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짊어지게 한 지금의 처분에.

  그렇다면 악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모든 무기를 빼앗기고 탈출에 대한 희망조차 완전히 끊어진 채, 죄를 씻어낼 기회조차 사라진 지금. 결국 남은 것은 자신이 쥔 정보밖에 없는 무력한 괴물은. 사냥꾼은 사냥감에게 목덜미를 물려 굴에 갇혔다. 이 우스운 결말에 악마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이것은 몹시 흥미롭다.

  생각만으로도 기대가 되어, 청년은 소년이 갇힌 곳으로 향한다. 이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어둑한 곳이 곳곳에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중에서도 소년이 갇힌 곳은 가장 비참한 곳이다. 감시는 언제든 닿고 있었으나 피해자인 청년이 드나드는 것 정도는 허락되고 있었다. 간부들은 때로 청년이 소년에게 해코지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양이지만 청년은 해코지는커녕 위협조차 한 적 없었다. 그저 바깥에서 소년을 지켜볼 뿐.

  창살 너머로 비치는 소년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무기력해 보였다. 모든 행동이 통제된 채 갇혀있었던 것도 꽤 오래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그동안 소년은 천천히 무기력함에 질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기 잃은 녹색 눈이 멀거니 밖을 향했다가 뜻밖의 방문객을 비춘다.

  “뭐야, 쿠로사키잖아?”

  여느 때처럼 가벼운 목소리였다. 핏기 없는 얼굴에 과장된 웃음이 떠오른다.

  “무슨 일로 왔어? , 설마 나와 싸우려고? 무리야. 지금은 덱이 없거든.”

  “단순한 놈이군. 유감이지만 아니다.”

  “그게 아니면 왜 찾아온 거야. 내가 잘 갇혀있나 구경이라도 하려고? 보다시피 아주 착실하게 가둬놔서, 나가는 건 꿈도 못 꿔. 이제 만족해?”

  “. 물론. 보기 좋은 모습이다.”

  “유감이겠네. 내게 손을 못 대서. 아직까지 여기선 내게 들을 게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거든. 그런데 네가 혹시라도 나한테 손을 대면 저쪽에서도 많이 유감이겠지? 어쩌나.”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거듭되는 심문에도, 아직껏 원하는 정보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고 했다. 청년은 소년이 정보를 발설하지 않는 것이 상부에 대한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악한 소년이 회사의 계산을 읽지 못할 리 없다. 입을 여는 순간 자신의 이용가치는 떨어진다. 그리고 이용가치가 사라지는 때에는.

  아무 말 없이 저를 지켜보는 청년 때문에 지루해진 것일까. 소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창살에 바짝 붙었다.

  “저기, 쿠로사키.”

  소년이 낮게 속삭였다. 창살 너머로 겨우 새어나온 소리는 허공에서 바로 흩어졌다.

  “나를 죽이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당장 죽여봐! 아무런 소득도 없겠지만 적어도 분풀이는 되지 않겠어? 너는 나를 찾아왔다가 내 도발에 넘어가서 실수로나를 죽인 거야. 나쁘지 않은 변명이지?”

  소년의 손가락이 창살 너머로 뻗더니 청년의 손으로 살그머니 향한다. 인간에게 죄를 범하도록 유혹한 사탄처럼. 저 아래서부터 치미는 혐오감에 청년은 그 손을 매정하게 떨쳐냈다.

  “왜 그래? 이게 네가 바라던 것 아니었어? 아카데미아에 복수해야지.”

  “너 따위로?”

  경멸을 가득 얹어 청년이 받아쳤다.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겨우 소년 따위로 복수심을 해소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청년에게 소년은 손을 더럽힐 가치조차 없는 인간이었다.

  “내가 노리는 건 너 따위가 아니다.”

  “그럼 누구를 노리는데?”

  “너희들의 수뇌지.”

  “미쳤구나!”

  소년이 깔깔댔다. 자지러질 듯 웃던 소년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겨우 진정하고 이죽거린다.

  “엑시즈인은 역시 멍청해. 하긴, 그러니까 정복당한 거겠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그딴 소리를 할 리가 없잖아? 사냥감 주제에 같잖은 여유 부리지 마. 너희 따위는 절대 상부까지 파고들 수 없어.”

  마땅히 분노할만한 공격이었으나 청년은 오히려 생각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적에게 누이를 빼앗겼을 때부터 그들을 인간으로 본 적은 없었다. 그들은 괴물이며 악마였기에. 저 오만하고 혐오스러운 발언도 악마에게는 합당한 것이 아닌가. 차라리 청년은 안도한다. 소년의 한 마디 한 마디로 다시 느낀 것이다. 지금 자신이 마주한 인간은 동정할 이유조차 찾을 수 없는 인간이며 구제할 수도 없는 악마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는 일말의 가책도 없이 이 소년을 증오하고 경멸할 수 있지 않은가.

  “레지스탕스? 오합지졸 패잔병들 따위를 모아서 대항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먹잇감 주제에.”

  “오합지졸 패잔병이라. 그래. 우리는 그랬었지.”

  처음부터 희망 없이 시작했다.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방어하는 것에 급급했다.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민간인들이었기에 방어만으로도 버거워 매일 동지들이 쓰러졌다. 쓰러지는 이들을 돌아보지 못한 채 몸을 숨기고 다음날이면 또다시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저항군이라는 이름조차 안쓰러울 정도로 무력한 존재였다.

  “예전에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적은 승리에 취해 먹잇감을 얕보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필사적인 싸움으로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상황은 반전한다. 오만한 적은 힘없이 무너지고 그들은 때로 승리를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카데미아 놈들이 우수한 사냥꾼이고 우리들이 한낱 먹잇감이라면 어떤 싸움이건 아카데미아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지.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내게 졌을까? 생각해본 적은 없나?”

  “생각하고 말 것도 없잖아. 진짜 실력을 내지 않아서야. 공평한 싸움이 아니었다고. 당장 지금이라도 다시 싸우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소년이 멈칫했다. 청년의 눈은 차갑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 눈빛을 소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의 막바지에, 소년에게로 폭격을 퍼붓던 때 보았던 것. 승리자의 눈.

  “너의 패인은 사냥꾼으로서의 오만이었다.”

  사냥감이었던 청년은 진단한다. 사냥꾼이 사냥감에게 붙들린 이유를.

  “아카데미아는 언제나 사냥꾼이었지. 그렇기에 감히 사냥감이 대항할 거라고 생각하질 못한 거다. 사냥감은 쫓기는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고 쫓기는 것을 거부하기로 했다. 대신 사냥꾼을 필사적으로 물어뜯는 거야. 작정한 공격은 누구에게든 치명적인 법이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여 방심하고 있던 자라면 더더욱.”

  “뭐야, 그래서 이제 우리를 물어뜯겠다고?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이미 입증하지 않았나? 네게 이긴 것으로 말이다.”

  소년의 얼굴이 분함에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청년은 희열을 느낀다. 이제 사냥꾼은 예전처럼 사냥할 수 없다. 사냥감이 사냥꾼에게 대항하여, 오히려 사냥꾼을 사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냥감에게 사냥당해 뒤쫓기는 사냥꾼이라.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사냥감인지 분간할 수도 없다.

  “가기 전에 하나 말해둘까.”

  청년은 돌아서며 말을 던진다. 소년을 떠날 모양이었다. 떠나기 전에 그는 붙잡힌 적에게 어떤 악독한 저주를 퍼부을 것인가. 소년은 제게 날아들 저주의 말을, 모욕을, 사냥감의 절규를 기다렸다. 그러나 날아든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절망은 바로 찾아드는 게 아니다. 조금씩 쌓이는 거다. 바닥부터 천천히 쌓이면서 사람을 물들이기 때문에 한동안 눈치채지 못해. 하지만 어느 선을 넘는 순간, 잠복하고 있던 것이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그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어. 완전히 절망에 잠식되어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게 돼.”

  그랬다. 절망에 물들어버린 자신이라면 안다. 절망이 어떻게 사람을 질식시키는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창살 너머 소년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청년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다.

  이곳에서 소년은 무력한 수감자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행동은 감시되며 타인에게 내부까지 낱낱이 파헤쳐진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무것도 없다. 이래서야 실험대 위에 놓인 동물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의미 없는 나날들은 무력함을 쌓고, 무력함은 절망을 부르고, 절망은 서서히 소년을 물들이다 마침내는 완전히 덮치고 말 것이다.

  결국 소년은 우리와 다름없는 이곳에서 맨정신으로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매순간 자신의 무력함을 자각하며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버둥거려야 하는 것이다. 청년의 말은 소년에 대한 참혹한 예언이었다.

  “그럼, 절망에 발을 내디딘 걸 축하해.”

  차가운 방을 떠나며 청년은 마지막 말을 던졌다. 그 얼굴에 문득 여유로운 웃음이 번진다.

  그것은 사냥꾼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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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소야 :